사울아, 사울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여라!
메리 앨리스 화잇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어릴 적 엄마가 “내가 부를 때 바로 오도록 해라. 두 번 부르게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엄마가 내 이름을 두 번 부른 적이 결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 번째 내 이름을 부르실 때면 재빨리 말을 듣는 편이 낫다. 안 그랬다간 큰일이 날 테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과 예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경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께서 이름을 두 번 부른 사람들은 단 일곱 명이다. 이 글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교훈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주님을 향한 열정
사울은 사도행전 8장 1절에서 초대 교회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처음 등장한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8).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8:1).
“스데반의 순교를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인, 듣는 사람의 영혼을 흔들었던 그의 말들에 관한 기억이 목격자들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1 사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데반의 믿음과 굳은 지조 그리고 영광은 사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2 그 거룩한 사람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순교하면서 남긴 그의 간증을 들으면서 사울에게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스데반이 순교하기 전, 산헤드린 회원들은 사도 중 몇 명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산헤드린을 향한 가말리엘의 연설로 인해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울은 가말리엘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인 가말리엘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아마 스데반이 죽으면서 남긴 말과 더불어 가말리엘의 담론에 동요되었을 것이다.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가 다른 이들의 삶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 구원의 씨앗에 물을 주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울은 스데반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스데반의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죽어 가는 한 사람의 극심한 고통과 은혜와 자비의 말들은 사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 편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사장과 관원들의 의견과 주장을 듣고 나서 결국 스데반은 신성 모독자이고 그가 전하는 예수는 사기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성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말이 틀릴 리 없다고 그는 믿었다.”3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의문이 풀리자 사울은 초기 그리스도인 교회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다른 이들의 삶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마치 잔잔한 물 위에 던져진 조약돌이 처음 떨어진 곳보다 훨씬 먼 곳까지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선을 위해 혹은 악을 위해 다른 이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울의 결정은 예루살렘과 그 이웃 마을, 이웃 도시들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유대 가정에서는 아마 사울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공문을 청하면서 그는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와 심판하기 위해 떠날 준비를 했다(행 9:1, 2 참조).
주님의 부름을 받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붙잡아 예루살렘에 있는 관련 기관에 넘기는 그의 사명에 매우 충실했고 용의주도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잘못된 결심은 잘못된 길로 이끈다. 비유적으로 사울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잘못된 길을 사울을 부르고 대면하는 바른길이 되도록 이용하셨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260킬로미터의 긴 여정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3, 4).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기 위해 사울에게 전할 중요한 기별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그의 행로를 바꾸기를 바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교도 철학과 유대교의 형식주의에 맞서 싸울 사람을 찾고 계셨다. 또한 당신의 사명을 선교 사역으로 실천할 준비가 된 열정적인 사람을 찾고 계셨다. 그분은 지나친 율법주의자보다 당신의 아들인 예수님과의 관계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을 찾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놀라운 가능성을 보셨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주님에 의해 변화되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주님과의 만남은 사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울의 생각을 바꾸어 주셨다. 사울은 자신의 참된 현실, 즉 주님이 절실히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울의 부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위한 부름이었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고 약속된 메시아를 섬기기 위한 부름이었다. 또한 삶의 방향을 바꾸고 긍정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한 부름이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부름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서, 개인의 구주로서 받아들였다.
당신의 다메섹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가? 잘못된 길 위에 있는가? 우리 자신의 다메섹을 향하여 길을 나서고 있는가? 방향을 바꾸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가? 우리 삶의 결정들이 궤도를 벗어나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자기 중심적인 사명을 이루려고 하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긍정적이고 건전한 결정들을 내리고 있는가? 우리의 결정들이 우리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사울처럼 우리도 항로를 바꾸고 다른 주소로 접속하여 우리의 영적 위치 추적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는가?
나에게도 자신만의 다메섹 길이 있었다. 내 방식대로 살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했다. 사울처럼 나 또한 그리스도를 만났다. 사울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내 삶을 변화시킨 경험이었다. 내 삶은 변했고 그리스도의 뜻과 방식이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모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세 부류의 사람에 관해 말한다. 그는 보통 사람, 영적인 사람에 대해 언급한 뒤 고린도 신자들을 세속적 혹은 육신에 속한 자로 설명한다. 지금의 우리도 여전히 이 같은 세 부류로 나뉜다.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나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이 충만하고 온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경배 사이를 오가는 세속적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없이 교인으로서의 이점과 축복을 누리길 원한다.
재림교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후자의 두 범주 중 하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교회의 교리를 온전히 믿을 수 있고 교회를 위해 사역하는 데 열성적일 수 있지만 변화의 경험을 하지 못했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첫사랑을 잊어버렸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다. 사울은 그리스도의 부름을 들었고 응답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이름을 몇 번을 부르셔야 할까?
1 엘렌 G. 화잇, <사도행적>(마운틴 뷰, 캘리포니아 주 : 퍼시픽 프레스 출판협회, 1911), 101쪽
2 엘렌 G. 화잇, <바울의 인생 개요>(배틀 크릭, 미시간 주 : 리뷰 앤드 해럴드 출판협회, 1883), 19쪽
3 같은 책, 21쪽
메리 앨리스 화잇
은퇴한 영양사이며 재림교회 마운트 피스가 아카데미의 활동적인 회원이다. 그녀와 은퇴한 그녀의 남편은 노스캐롤라이나 애쉬빌에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