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임한 복
갓 태어난 어린 교회를 양육하다
게하르트 판들
유럽은 북아메리카 밖에서 재림 기별이 전파된 첫 번째 대륙이었다. 마이클 벨리나 체코브스키(1818~1876)는 회심한 폴란드 사제로 신생 교단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위해 유럽 선교사가 되려는 열망이 있었다. 지도자들이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일요일 준수 재림 신도들에게서 후원을 받았다. 1864년에 그는 북이탈리아의 왈덴스 계곡인 토레 펠리스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리를 가르쳐 신자의 무리를 결성했다. 그는 스위스와 루마니아에서도 다른 모임을 결성했다.
유럽은 교단의 첫 번째 공식 선교사를 맞이하였다. 스위스에 있는 신자들의 절박한 요청에 따라 대총회는 존 네빈스 앤드루스를 보냈고, 그는 자녀 찰스, 마리아(그의 아내는 1872년에 사망하였다.)와 함께1874년 10월 16일, 스위스 노이차텔에 도착하였다. 유럽에서 9년간 헌신적으로 사역한 후에 그는 54세의 나이로 1883년, 스위스 바젤에 묻혔다.
유럽은 또한 엘렌 화잇이 방문한 첫 번째 대륙이었다.1 1884년, 스위스 바젤의 제2차 유럽 선교 대회에서는, 엘렌 G. 화잇과 그의 아들 W. C. 화잇이 유럽 선교지를 방문하도록 대총회에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대양 건너편에서 온 이 호소에 응답하여 엘렌 화잇과 그녀의 아들은 1885년 8월, 영국 리버풀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영국 선교의 기틀을 세웠던, 영국 선교 잡지 <현대 진리>의 편집장 윌리엄 잉그스와 영국에서 5년의 시간을 보낸 J. N. 로프보로우 부부를 만났다.
영국에 도착한 엘렌 화잇은 1884년 이래 선교와 출판 사업의 본부가 있었던 그림스비를 방문하였고 또 런던과 사우샘프턴을 포함한 여러 도시도 방문하였다. 1874년, 꿈에서 그녀는 세계의 죽어 가는 도시들을 보고 말했다. “그대들이 전하고 있는 기별이 세계적인 기별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라. 그것을 모든 도시와 모든 촌락에 전해야 한다. 그것을 큰길과 샛길에 선포해야 한다. 그대들은 기별의 선포를 한 지방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2
스위스에 거주하다
런던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도버로 가는 기차를 탔고, 해협을 건너 프랑스 칼레에 갔다. 그리고 1885년 9월 3일, 그녀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중앙 유럽 본부가 있는 바젤에 도착했다. 유럽에 체류하는 2년간 그녀는 이곳에 거주했다.
엘렌 화잇이 출판사를 방문했을 때, “휘트니 목사는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우리의 예배실을 보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 방은 조명이 잘되어 있고 비품도 잘 갖추어진 좋은 방으로 1층에 있었다. 화잇 여사는 그 방을 유심히 둘러보고는 ‘이곳은 참 좋은 예배실이군요. 그런데 전에 내가 이곳을 보았던 것같이 느껴집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직후에 그들은 건물 중에 인쇄 사업을 위하여 사용되는 공간으로 갔다. 인쇄실에 도착했을 때 인쇄기가 가동되고 있었는데, 화잇 여사는 또다시 ‘나는 이 인쇄기를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방은 내게 매우 익숙해 보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곧이어 인쇄실에서 일하는 두 청년이 앞으로 나와 방문자들에게 소개되었다. 화잇 여사는 그들과 악수한 다음에 ‘다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다른 사람이라니요?’라고 휘트니 목사가 되물었다.
‘여기에 나이 든 사람이 한 명 있지요? 나는 그에게 전할 기별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화잇 여사는 대답하였다.
휘트니 목사는 인쇄실 책임자가 시내에 용무를 보러 갔다고 설명하였다.
이 일은 화잇 여사가 외국 여러 곳에서 성취될 사업에 관한 이상을 받고 배틀크릭 교회에 모인 많은 청중에게 그 사실을 전달한 지 십 년이 조금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때에 화잇 여사는 이상 중에, 여러 나라에서 인쇄기들이, 각 나라에 사는 백성들에게 전할 현대 진리가 실린 정기 간행물과 전도지와 책자들을 인쇄하는 광경을 보았다고 말했었다.”3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경험은 유럽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교인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사업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바젤에 도착하자마자 엘렌 화잇은 그곳에서 열린 제3회 유럽 선교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들이 취한 결정 중 하나는 엘렌 G. 화잇과 그녀의 아들 W. C. 화잇에게 “스칸디나비아, 영국 그리고 다른 선교지를 방문하라.”4고 초청한 것이었다. 이어진 2년 동안 그녀는 바젤에 잠정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 있는 교회들과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유럽 여행
그녀는 첫 번째 여행 때 기차를 타고 독일을 가로질러 스칸디나비아에 갔다. 이 나라들에는 교회 18개와 대략 800명의 안식일 준수자가 있었다. 노르웨이 크리스티나에서 지역 절제협회 회장이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강당인 군부대의 체육관에서 강연을 해 달라고 초청했다. 엘렌 화잇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절제를 제시하였다. 아주 다른 것을 예상한 청중은 “처음에 놀라고 그다음에는 흥미를 보이고 마침내 깊은 감동을 받았다.”5 참석자 1,600명 중에는 국교회 주교를 비롯해서 목회자 다수를 포함한 유력한 시민이 많았다. 그것은 그녀가 유럽에서 강연한 가장 큰 청중이었다.
유럽 신자들은 징병과 안식일의 학교 출석 같은 독특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안식일에 자녀를 집에 남겨 둔 일부 부모들은 벌금을 냈고 다른 이들은 감옥에 갇혔다. 이런 문제에 당면해서 엘렌 화잇은 교인들에게 학교 당국과 상의를 하도록 촉구하였다. “이런 일이 실패한다면 그때 그들의 의무는 분명하다. 그것은 어떠한 값을 치르든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6
이태리에서 그녀는 왈덴스 계곡을 방문했다. 그녀는 보비오 산으로 가서 왈덴스에 은신했던 사람들이 박해자들에게 연기로 질식당했던 동굴을 방문하였다. 그녀가 유럽 여행을 하며 다닌 종교 개혁과 연관된 장소들은 1888년에 <각 시대의 대쟁투> 수정판을 낼 때 도움이 되었다. 그녀의 아들 W. C. 화잇은 1934년에 이렇게 적었다. “바젤에서 2년을 거주하는 동안 어머니는 종교 개혁의 때 중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 여러 장소를 방문했다. 이것은 그녀가 이상 중에 보았던 기억들을 새롭게 해 주었으며 그 책에서 종교 개혁 시기를 다루는 부분들을 중요하게 여겨 분량을 늘리게 하였다.”7
미국으로 돌아가다
1887년 8월 3일, 그녀는 뉴욕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위해 리버풀에서 시티 오브 로마호라는 배를 타고 8월 11일에 도착했다. 유럽 사역에 대한 회상은 그녀가 스위스에서 돌아온 지 네 달 후에 기고한 <리뷰>지의 한 기사에서 발견된다. “유럽에서 2년을 보낸 후 우리는 미국에서의 다른 여러 선교지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보다 그곳의 사업 상태에 대해 낙담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을 보았다.”8 유럽에서 보낸 그녀의 시기는 그곳의 성장하는 교회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들 당시 유럽의 신자들은 대략 7,000명으로 북아메리카 다음으로 교인 수가 많았다.
1. 엘렌 화잇이 유럽에 머문 시기에 대해서는 D. A. 델라필드의 <유럽에서의 엘렌 G. 화잇>(영국, 그랜햄 : 스탠보로우 프레스, 1975년)과 아더 L. 화잇의 <홀로 보낸 시간 : 1876~1891>(해거스타운,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 1984년)에서 도움을 얻어 정보를 찾았다.
2. 엘렌 G. 화잇, <교회증언> 7권, 35, 36쪽
3. 엘렌 G. 화잇, <엘렌 G. 화잇 자서전>, 282, 283쪽
4. <리뷰 앤드 헤럴드>, 1885년 11월 3일 자
5. <역사 스케치>(스위스 바젤, 임프리메리 폴리그로트), 211쪽
6. 상게서, 216쪽
7. 아더 L. 화잇, <엘렌 G. 화잇의 저술들>(워싱턴 D. C. :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 1973년), 127쪽에서 재인용
8. 엘렌 G. 화잇, <리뷰 앤드 헤럴드>, 1887년 12월 6일 자
게하르트 판들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대총회 성경연구소의 비상근 부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