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목사에서 심령주의자로
제임스 R. 닉스
1863년 9월 20일, 미국 뉴햄프셔 주의 맨체스터에서 열린 어느 예배 모임에서 설교자가 자신은 더 이상 설교를 하지 않을 것이며 인디애나 주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자 신도들은 충격에 빠졌다.1 명성이 자자한 설교자이자 힘 있는 토론가이며 저술가이기도 한 모세 헐이 재림교회에서 사역을 접었다.
신자 대다수는 1864년 1월 5일 자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오늘날의 <애드벤티스트 리뷰>)에서 헐이 심령주의자가 되었다는 공지를 보고 그의 배교를 처음 알게 되었다.2 그리고 일주일 뒤 그가 배틀크릭에서 공개 모임을 열고 거기서 최초로 강신술을 지지했다는 기사가 <리뷰>지에 실렸다.3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유명한 설교자임에도 그토록 신속하게 재림 신앙을 등지고 열렬한 강신론 옹호자로 돌변할 수 있었을까?
초기 역사
모세 헐은 1835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16명의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4 형제 중에는 쌍둥이가 세 쌍이나 있었는데 모세의 쌍둥이 형 아론은 어릴 때 사망했다.5 아버지인 제임스 헐 박사는 침례교회 신자였다.
몇 년 후 사람들은 모세를 “키는 보통에 못 미치지만 건장한 체구에 태도가 똑바른 아이, 머리는 크고 신체 크기는 보통이며 습관적으로 잘 웃는 아이”로 기억했다.6 또 노래할 때 맑은 테너 목소리로 유명했다.7
19세에 처음 결혼했지만 안타깝게도 결혼한 지 8주도 되지 않아 아내가 사망했다.8 그는 당시 16살이었던 엘비라 라이트너와 곧 재혼했다.9 이들 내외는 딸 넷을 두었고 그중 막내는 모세가 재림교회를 떠나겠다는 발표를 3주도 남겨 두지 않았을 때 태어났다.10
1857년에 안식일 준수 재림교회 신자가 되었을 무렵11 모세는 이미 다른 세 교회12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중 한 교회에서 16세 때부터 설교를 시작했다.13 제칠일 안식일을 받아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위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1863년 재림 신앙을 버리기 까지 <리뷰>지에는 헐이 쓴 기사가 많이 보였다.
복음 전도자 그리고 변론가
1858년 8월, 모세 헐은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마 제임스 화잇으로부터 받은 것 같다.14 화잇이 아이오와 주 아이오와 시를 방문하기 한 달 전에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거기서 헐과 와그너가 장막 전도회를 개최하고 있었다.15 이전부터 모세는 아이오와에서 장막 전도회를 위해 J. H. 와그너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16 새로 안수를 받은 헐은 곧 여러 주를 다니며 홀로 장막 전도회를 이끌었다.
시간이 지나자 헐은 단순히 설교만 하기보다는 공개 토론에도 참석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설득력 있는 논쟁으로 토론에서 이길 때가 많았지만, 사람들이 기존 교회를 떠나 안식일 준수자가 되도록 결심시키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심령주의자가 되고 여러 해가 지난 1901년에, 헐은 한 토론에서 “회심시키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논쟁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시인했다.”17
재림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하다
헐은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서 개최된 두 가지 중요한 회의에 참석했다. 첫 번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라는 이름이 선택된 해인 1860년이었고 두 번째는 대총회가 조직된 1863년이었다.18 이 두 역사적 모임 사이의 기간 동안 헐은 심령술사들과 논쟁하기 시작했다. 엘렌 화잇을 비롯한 다른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행동을 경고했지만 그는 중단하지 않았다. 1862년 10월, 동행하는 목회자가 한 사람도 없는 가운데 그는 혼자만의 결정으로 미시간 주 포 포에 찾아가 토론에 참석했다. 거기서 헐은 혼란스러움을 느꼈고 결국 자신도 심령주의자가 되겠노라고 토론 상대에게 말했다. 상대방은 헐이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의 결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다.19

모세 헐 : 헐은 초기 재림교회에서 복음 전도자이자 토론가였다.
포 포에서의 토론이 있은 지 얼마 뒤, 신앙이 흔들리는 이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려고 몇몇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배틀크릭에 있는 J. N. 러프버러의 집에서 헐을 만났다. 그날 저녁 엘렌 화잇은 이상 속에서 헐에 대한 기별을 받았다.20 헐에 관해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낭떠러지 끝에 서서 뛰어내리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났다. 그가 뛰어내린다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되고, 그의 영원한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21
그 기도 모임은 헐에게 도움이 된 것처럼 보인다. 1864년 1월 자 <리뷰>지는 그가 전달한 공개 서한을 게재했다. 헐은 포 포에서 W. F. 제이미슨과 논쟁한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W. F. 제이미슨의 몸을 빌어 말하지만 자신은 다우닝 씨의 영혼이라고 밝힌 악령”과 토론한 사실을 부분적으로 시인했다. 헐은 또한 “나는 이제 그러한 영혼들과 토론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의심스럽다.”22라고 덧붙였다.
자신이 토론한 대상은 W. F. 제이미슨이 아니라 다우닝 씨의 영이라고 주장하는 마귀였다고 시인한 것으로 보아 헐은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강신술에 관해 엘렌 화잇이 출간한 글23을 틀림없이 읽었을 뿐 아니라 강신술에 관한 재림교회 최초의 책 가운데 하나를 저술한 J. H. 와그너와도 함께 일했다.24 또한 헐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한 짧은 글을 쓰기도 했다.25
재림교회를 떠나다
1863년 6월에 개최된 대총회 이후 헐은 J. N. 러프버러와 함께 복음 전도를 위해 뉴잉글랜드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품었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마침내 그해 9월에 헐은 재림교회를 떠나 심령주의자가 되었다.26 그는 자신의 아내27와 딸 네 명28, 또 초기에 가끔씩 자신과 함께 복음 전도 활동을 펼친 형 다니엘 W. 헐29도 함께 데려갔다.30
심령주의자로 살면서 모세는 강신술을 옹호하는 여러 논문을 출판하고31 수많은 책과 팸플릿을 만들었다.32 그뿐 아니라 아내를 버리고 영매자 매티 소여와 사실혼 관계로 살았다.33 ‘자유 연애’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던 그들은 결국 추문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한동안 심령주의자들조차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었다.34 1902년부터 헐은 영매들을 훈련하기 위해 설립된 교육 기관인 모리스 프랫 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35
일찍이 몇 년 전에 엘렌 화잇은 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만일, 그대가 강단 안팎에서 헌신적이요 경건한 사람이 된다면, 강력한 감화가 그대의 설교에 따르게 될 것이다.”36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헐의 삶에서 배워야 할 가장 분명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1860년에 그 자신이 말한 것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도중에 넘어질 수 있지만 만약 넘어지더라도 감사할 것이다. 그 도성은 그곳의 거주자들이 획득할 수 있을 만큼 값이 싸기 때문이다.”37
제임스 R. 닉스
미국 메릴랜드 주 실버 스프링에 위치한 엘렌 G. 화잇 유산 관리 위원회 소장이다.
1. J. N. 러프버러, (Battle Creek, Mich. : General Conference Association, 1892), 252쪽
2.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64년 1월 5일, 45쪽
3.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64년 1월 12일, 56쪽
4. 1902년 3월, 2쪽; (between Moses Hull and W. F. Jamieson, 1904), 4쪽(이것은 모세 헐이 쓴 자전적인 책이다.); 다니엘 헐은 연도를 다르게 말한다(<모세 헐>[1907], 13쪽 참조). 그는 남동생이 1836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5. 1902년 3월, 2쪽; , 4쪽
6. Victoria Barnes, comp. (1948), 128쪽
7. <청년 지도자>, 1938년 11월 22일, 3쪽
8. 다니엘 헐, 22쪽; , 1902년 3월, 6, 7쪽
9. ancestry.com에 따르면 그들은 1854년에 결혼했다.
10. ancestry.com에 따르면 알파레타 헐은 1863년 9월 2일에 태어났다.
11. 다니엘 헐, 22쪽
12. 헐은 다른 두 교회의 신자였지만, ([Hagerstown, Md. :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96], vol. 10, 718)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 그가 감리교 신자였을 가능성은 포함하지 않는다(다니엘 헐 19쪽 참조).
13. 1902년 3월, 4쪽
14.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58년 9월 23일, 140쪽
15.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58년 8월 5일, 92, 93쪽
16.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58년 5월 27일, 12, 13쪽; 1858년 7월 22일, 76쪽
17. 103쪽
18.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60년 10월 23일, 178, 179쪽; 1863년 5월 26일, 204~206쪽
19. 1912년 6월 6일, 2쪽;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906년 4월 19일, 9쪽
20. 러프버러, 246~248, 251쪽; , 1912년 6월 13일, 1쪽; 엘렌 G. 화잇, <교회 증언> 1권, 426~433쪽
21. 엘렌 G. 화잇, <교회 증언> 1권, 427쪽
22.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63년 1월 27일, 69쪽
23. 엘렌 G. 화잇, (Sarasota Springs, N.Y. : James White, 1851), 47쪽; (Rochester, N.Y. : James White, 1854); (Battle Creek, Mich. : Steam Press, 1858) 1권, 173~179쪽
24. J. H. 와그너, , 2nd ed.(1860). 초판은 헐과 와그너가 함께 일하기 전인 1857년에 출간되었다.
25. 모세 헐, (1862)
26. 1912년 6월 13일, 1쪽; 러프버러, 251, 252쪽
27. 1873년 9월 6일 자 5쪽에 게재된 Elvira L. Hull의 편지와 저자가 소장한 다음의 미발간 타이프 원고 사본을 참조하라. – Alice Thompson Edwards, ‘My Memories of Moses Hull’, 7쪽(원고 일부는 <청년 지도자> 1938년 11월 22일 자 1, 3, 10, 13쪽에 소개되었다.)
28. 다니엘 헐, 40쪽. 여기에는 암시만 되었을 뿐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정확히 네 명은 아니지만 그의 딸 두세 명이 강신술에 빠졌다는 진술을 필자는 다른 곳에서 발견했다.
29.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68년 7월 28일, 16쪽
30.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59년 10월 20일, 176쪽
31. Julia Schlesinger, (1896), 56, 57쪽
32. 상동, 57, 58쪽. 필자는 헐이 심령주의자가 된 다음 저술한 서적 11권과 여덟 가지 팸플릿(100페이지가 안 되는 글들)을 알고 있다.
33. Mattie Hull, (1888), xv, xvi; <청년 지도자> 1938년 11월 22일 자 13쪽
34. 다니엘 헐, 40~42쪽
35. 상동, 67~70쪽; Morris Pratt Institute에 관한 웹사이트를 참고하라.
36. 엘렌 G. 화잇, <교회 증언> 1권, 433쪽
37.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63년 3월 29일, 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