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라
제럴드 A. 클링바일
예루살렘에서의 삶이 예전 같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은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한 경험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당신의 백성이 영원히 거주하게 될 곳이 아니었던가?(역대하 23:23 참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왕좌에 있을 거라고 확언하지 않으셨던가?(22:10 참조)
예루살렘 주변의 세상이 불타오르고 있고 또 그 불길이 점점 예루살렘으로 더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그 약속들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유다 백성은 요시야 왕을 사랑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다(왕하 22~23장 참조). 성전이 재건되었고 수십 년 동안 등한시된 하나님의 율법은 재발견되고 선포되었다. 백성들은 주님께 한 그들의 언약을 새롭게 했다. 사정은 나아졌고 요시야 왕은 한때 북방 유다의 영토 일부까지 뻗어 나가면서 남방 유다의 경계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23:15~20 참조).
하지만 이제 평범하고 사악한 왕들의 통치 아래 단순하고 형편없는 통치의 승계로 인해 예루살렘은 포위되어 있었다. 위대한 앗시리아 제국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동쪽에서 온 새로운 세력인 바벨론은 급속히 추락하고 있는 제국을 빠른 속도로 삼키려 하고 있었다. 바벨론의 왕세자인 느부갓네살은 그의 군대와 동맹국들과 함께 남쪽의 팔레스타인까지 와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인 예루살렘을 막 정복하기 직전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필요할 때 정작 그분은 어디에 계셨는가?
어려운 문제들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 지 삼 년”(단 1:1 참조)째인 B. C. 605년에 바벨론 왕에게로 끌려간 젊은 인질들의 마음속에도 이와 비슷한 의문들이 들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시였고 하나님의 성전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니엘이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을 그(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시매’(1:2 참조)라고 어떻게 쓸 수 있었겠는가? 이는 언약의 백성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도시, 주님이 직접 뽑은 다윗의 왕조를 다스리는 이교도의 왕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것을 납득할만한 대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세상의 역사와 같은 더 큰 문제들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이 권력과 연줄,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조정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느껴질 때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불편한 진실
다니엘서는 마지막 시대를 다루는 묵시적 장면이 가득한 예언서만이 아니다. 또한 독특한 방법으로 성경적이면서도 때로는 몹시 불안하게 만드는 역사의 철학을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서에서 여러 번 ‘주셨다’. 당신은 예루살렘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셨고(단 1:2 참조) 또 다니엘과 그 친구들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9절 참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네 소년에게 바벨론 법정의 지식과 재주, 지혜를 주셨다(17절 참조). 그래서 다니엘은 처음부터 다니엘서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손과 발, 시간, 미래, 심지어 이교도 왕들까지도 관장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벌하기 위해 한 이교도 왕을 사용하셨다. 동시에 당신의 왕국을 위해 당신의 백성이 그 이교도 왕을 섬기고 영향을 끼치도록 준비시키신다. 다니엘서 2~6장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많은 사람에게 매우 친숙하다.
어마어마한 신상에 대한 기억나지 않는 꿈이나 풀무 불에 던져진 다니엘과 세 친구, 미쳤다가 다시 회복된 왕, ‘그들 시대의 징조들’에 주목하지 않은 사람으로 가득 찬 궁전의 한쪽 벽에 하나님의 기별이 쓰여진 것, 혹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려는 노력,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관장하신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인과 함께하는 삶이 성공과 축복 그리고 재물만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다니엘의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신념으로 인해 고통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단 3, 6장 참조). 그들의 여정이 언제나 순탄한 것은 아니며 항상 할리우드식의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그들의 마음가짐을 바꾸시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심이 추방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와 신념을 반영하는 것인지를 궁금해하는 이도 있다. 그들이 진정 그 금신상 앞에서 절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이었을까?(3장 참조)1
역사를 관장하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관장하신다.’라고 주장할 때 과연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구를 파괴하고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야기한 히틀러와 스탈린, 폴 포트, 네로, 또 그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으신가? 이 중요한 질문이 이치에 맞기 위해서는 역사의 사건들 뒤에 있는 우주 분쟁이라는 더 큰 그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루시퍼의 첫 비난과 그가 심은 의심의 씨앗으로 시작된 이 충돌은 결국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공격하기 위해 뱀과 아담과 이브를 이용한 에덴동산에서의 사탄과 같은 인형 조종자인가?(창 3장 참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전히 사탄의 결정과 그 결정들이 받아들여질 여지를 제공하실 수 있는가? 그러면서 동시에 어떻게 구원의 계획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가?
이에 대해 다니엘 2장은 몇 가지 도움이 되는 근거들을 제공한다. 바벨론의 왕인 느부갓네살은 꺼림칙한 꿈을 꾸고는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갈대아 술사들과 지혜로운 자들을 불러 그 꿈과 그에 대한 해석을 자기에게 고하게 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니엘을 빼고는 말이다. 다니엘은 평점 A를 받은 우수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는 똑똑하고 창의적이었다. 하지만 그 꿈과 해석을 스스로 말할 수는 없었다.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와 함께 하룻밤을 기도로 보낸다(17~19절 참조). 그날 밤 하나님의 이끄심을 구하며 기도드릴 때 다니엘은 그 꿈과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는 이상을 본다.
하나님의 주심에 대한 다니엘의 찬송은 역사에 대한 성경의 철학을 가장 잘 요약해 준다. “그(하나님)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21, 22절).
하나님께서는 또한 세계 역사의 큰 그림도 관장하신다. 이교도 왕이 당신의 성전과 당신이 택한 도시를 멸망시키도록 허락하신 것은 더 큰 계획의 일부였다. 그분은 제멋대로인 유다를 구하고 싶으셨다. 교만한 바벨론에 다가가 우주 전쟁의 맥락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길 원하셨다. 그리고 기꺼이 그 비용을 지불하길 원하셨다.
다니엘도 하나님의 계획을 전부 알진 못했지만(9:1~23 참조) 구주를 개인적으로 알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보았으며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을 떠나 세속적이고 낯선 환경 속에 살면서 또 ‘왜?’라는 질문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관장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리고 열정적으로 우리의 크고 작은 삶에 관여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우리의 삶을 관장하시도록 한다면 우리의 삶은 단순한 운명의 하루보다 훨씬 값질 것이다.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부편집장이며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보기를 좋아한다. 그는 현재 미국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에서 아내 샨탈과 그들의 세 딸과 함께 살고 있다.
1. 느부갓네살 왕이 각 도의 모든 관원을 소집하게 한 사실을 감안하면(단 3:2 참조) 유다의 여호야김도 그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