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 기록계에 찍힌 그분의 계획
1843~1847년
성경 역사를 연구할수록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확신이 선다.
하나님의 시간 기록계는 세상 사건들을 이끄시는 그분의 손길을 창조 주간 이래로 계속 추적해 오고 있다! 부조와 선지자의 시대부터 역사를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눈 예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늘 충성스러운 기별자들이 ‘현대 진리’를 선포하게 하셨다.
시간이 흘러 사도와 개혁가의 시대에서도 더욱더 신실한 기별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하나님의 시간 기록계가 다시 한번 타점을 찍었다! 그 새로운 기별자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어디에서 나타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기별자 대부분은 바로 미국의 동북부 끄트머리에서 온 강인한 뉴잉글랜드 사람들이었다.
새로 등장한 기별자들
침례교 설교자인 윌리엄 밀러는 다니엘 8장 14절에 나오는 2300주야 예언이 1843년이나 1844년에 끝난다고 고향인 뉴욕 주 로햄튼에서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께서 곧 재림하시고 모두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온 세상에 알려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 메인 주에서는 21세의 교사 제임스 화잇이 밀러의 기별을 받아들였고 1843년 1월에 말을 빌려 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일평생 ‘현대 진리’를 선포하는 그의 설교 여정을 시작했다.
제칠일침례교인인 레이첼 오크스-프레스톤 부인은 뉴햄프셔 주 워싱턴에서 프레드릭 휠러 목사에게 제칠일 안식일의 타당성과 중요성을 전해 주었다. 곧 밀러파 재림 신도 가운데 작은 그룹 하나가 하나님의 특별한 성일을 준수하기 시작했다. 매사추세츠 주 페어헤이븐 출신의 은퇴 선장인 조셉 베이츠는 이 그룹이 전하는 새로운 ‘현대 진리’를 듣고 나서 이 진리를 전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안식일의 사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동북부 여러 주에서는 거의 50만 명이 곧 오실 예수를 고대하면서 1844년 10월 22일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바로 그날이라는 소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즐거이 전파했다. 예수님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그날이 지나가자, 행복과 기쁨은 우울과 절망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많은 사람이 최고의 친구인 예수님과 함께 저 하늘 본향으로 날아가리라는 큰 기대 속에 농장을 팔고,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청산했다. 이제 사람들의 조롱을 감수해야 했고,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슬러 다가오는 매서운 북부 지방의 겨울을 준비해야 했다. 실망한 신자 중에는 뉴욕 주 포트 깁슨에 사는 하이람 에드슨도 있었다. 그 역시 열정적으로 ‘현대 진리’를 전했던 사람이었다.
에드슨은 친구 몇을 불러, 자신의 헛간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기대와 달리 예수님이 오지 않으신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자고 권했다.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에드슨이 실망한 동료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자신의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였다. 그는 예수께서 재림 전에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사역을 마치기 위해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신다는 통찰을 얻었다. 히브리서 8, 9장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현대 진리’가 구체화되었다.
1844년 12월, 메인 주 포들랜드에서 17세였던 엘렌 하몬은 재림 신자들이 좁은 길을 걸으며 지상에서 하늘로 여행하는 환상을 보았다. 비록 몸이 약하고 소심했지만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특별한 기별자로서 봉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새로운 ‘현대 기별’이었고 엘렌 하몬은 남은 생애 동안 저술하고 전하며 재림교회를 지도했다.
기별자들의 연합
엘렌 하몬이 1845년에 뉴잉글랜드 전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모임에서 하나님께 받은 수많은 기별을 전하던 중,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현대 기별’을 거침없이 전하는 젊은 밀러주의 설교가 제임스 화잇을 만났다. 헌신적인 두 청년은 같은 모임에서 종종 마주쳤고 각자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증거 하면서 우정이 싹텄다.
조셉 베이츠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제칠일 안식일에 관한 ‘현대 진리’를 열렬히 전했다.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작은 책이나 안내 책자를 주면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1846년에 <제칠일 안식일, 영원한 표징>이라는 48쪽짜리 소책자를 출판했다.
1846년 8월 30일, 엘렌 하몬와 제임스 화잇은 결혼하였고 사역에도 하나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제임스와 엘렛 화잇 부부와 조셉 베이츠가 메인 주 토프셈에서 열린 재림 총회에 모두 참석하면서 향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공동 창시자 세 명이 함께 힘을 모으게 되었다!
1847년에는 세 사람의 기별자가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사역하며 재림 운동에서 세 천사의 기별이 지닌 중요성을 역설했다. 베이츠는 <재림의 이정표와 높은 희망, 1840년에서 1847년 사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일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예언의 성취>라는 안식일 팸플릿을 발간했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구원의 마지막 기별을 전하기 위해 알맞은 조각들과 알맞은 인물들을 모으셨다. 분명 예수께서는 다시 오신다. 그들은 진심으로 믿었다.
앨리스 R. 부라이스
미국 테네시 주 콜리지데일에 거주하며 재림교회 유산을 보호하고 알리는 데 헌신하고 있는 은퇴 교육자이다. ‘재림교회 유산 관리 위원회’의 전직 회장이며 현재는 편집자로 봉사 중이다.
운동이 시작되다
1848~1853년
오늘날 모든 대륙과 거의 모든 국가에 퍼져 있으며 교회 7만 1천 곳과 예배소 6만 6천 곳에서 교인 1천 7백만 명이 1,000개에 가까운 언어와 방언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재림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를 상상해 보자. 대신 결집력이 약하고 미국 동북부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대부분 가난한 젊은 성인으로 구성된 작은 집단을 마음속에 그려 보자.
불과 얼마 전에 모든 것을 걸었던 희망이 산산조각 났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의 봉사와 성경의 진리, 이 땅 역사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에 대한 퍼즐 조각을 서서히 맞추어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은 끝을 알 수 없는 가운데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맞아야 했고 150년 이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미래가 확실하고 필연적이지도 않았음을 염두에 두자.
시작
때는 1848년이었다. 열정적인 설교와 함께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던 순간, 긴급한 준비, 전력을 다한 증언, 부단한 연구, 끊임없는 기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으로 정점을 찍었던 밀러주의 운동이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조셉과 프루던스 베이츠 그리고 신혼부부인 제임스와 엘렌 화잇을 포함하여 일부 밀러주의자들은 이 비극을 딛고 더 강하고 진실되게 일어서고자 하는 열망이 서로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더위와 추위를 견디고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면서, 건강할 때보다 아플 때가 많았지만 여러 지역을 누비며 이전의 밀러주의자들은 물론 성경 진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찾아가 늘 위로하고 격려하고 가르쳤다.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가운데, 성경에서 등한시되었던 진리가 재조명되면서 근면하고 성실한 27세의 제임스 화잇과 21세의 그의 부인 엘렌의 지도하에 자라고 있는 운동이 하나로 연합될 수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을 이끄는 강력한 이상들을 받는 은혜를 입었다. 이 진리들만이 신자들을 한데 묶어 주었다. 이 진리에 대한 자각은 여러 곳에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지 스토스가 친구에게 쓴 편지 세 통은, 그리스도께서 호명하시는 재림 때까지 죽은 자들은 아무 의식이 없이 기다리게 된다는 내용의 소책자로 재구성되었다. 하이람 에드슨이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중보 사역에 관해 눈이 트인 곳은 옥수수와 호박이 자라는 밭이었다. 제칠일침례교 신자인 레이첼 오크스-프레스톤 부인은 갑작스러운 만남에서 참예배일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프레드릭 휠러가 말도 꺼낼 수 없게 했다.
더 깊게 파기
1848년 봄, 거의 24회에 달하는 총회 중 첫 모임이 소집되었고 신자들은 그들의 신념을 확정하기 위해 함께 성경을 연구했다. 이 모임들은 헛간, 집, 기타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 여러 곳에서 개최되었고, 때때로 시끄럽고 지루한 논쟁으로 일관되고 항간에 떠도는 괴상한 믿음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아니 섭리에 의해서, 별 기미가 안 보이는 회의를 통해 집단적 이해가 깊어 갈수록 화폭의 배경처럼 교리 체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하나씩 조각들이 자리를 채우면서 모습을 갖춰 나갔다.
책을 찍어 내자
같은 해, 아직은 미약한 운동이 결국 전 세계로 널리 퍼지게 될 것이라는 환상이 젊은 엘렌 화잇에게 주어졌다. 그녀의 남편은 “소책자를 찍어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고, “시작은 미약”하지만 사업은 성공을 거두어 “전 세계를 한 바퀴 도는 빛줄기와 같이” 빛날 것이다.1
이것은 전혀 불가능해 보였다. 이 환상을 보았을 당시 제임스와 엘렌 화잇 부부는 집도 돈도 없었고 신자가 100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순종했고 1849년 7월 <현대 진리>라는 8페이지짜리 소책자를 만들었다. 이 책자는, 오늘날까지 지구 상에 매일 배포되고 있는 정기 간행물 수백 종류와 수천 가지 출판물의 효시이다.
재림교회의 모태가 된 이 단체는 인쇄물이 보급되고 남녀노소를 불문한 복음 전도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1848년 신자100명에서 1852년 약 2,0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조직,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신자 수가 급증하자 모종의 조직이 필요했다. 1850년대 초기 조직이 형성될 때만 해도 신자들의 필요에 적절히 대응하거나, 재정을 운용하고, 사역 지도자를 승인하고, 부동산 소유 합법화를 책임질 체계나 계획이 정립되지 않았다. 조직의 필요성은 교회 기관지 <세컨드 애드벤티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The Second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에서 누차 언급했지만, 화잇 부부가 서적 발행을 시작하면서 운동이 점점 더 커져 가고 그에 따른 무거운 짐을 거의 대부분 화잇 부부가 질 수밖에 없을 때에야 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 밀러주의자들은 교회 조직에 대해 경계했다. 그 조직 때문에 그들은 떠나야 했고 조직으로부터 그들은 박해를 당했으므로 조직에 대해 반발했다.
나라를 초토화시킨 전쟁으로 인해 마침내 조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당시에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벤자민 베이커
역사학 박사로 미국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에 소재한 재림교회 세계 본부에서 문서 보관 부담당자로 봉사하고 있다.
1. Ellen G. White, <엘렌 G. 화잇 자서전(Life Sketches)>, 125쪽
조직을 향한 조짐
1854~1859년
신자 세 명의 눈을 통해 1854년에서 1859년 사이 그분의 백성이 조직을 이루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족의 재회 : 헨리 니콜스 화잇(1847~1863)
헨리 화잇 생후 10개 월 무렵, 부모가 자유로이 여행을 다닐 수 있도록 클라리사 본포이가 어린 헨리를 맡아 기르게 되었다.1 몇 달 뒤 헨리는 메인 주 토프샘에 있는 하우랜드가에 맡겨진다.2 하우랜드가의 아홉 살 된 딸 프랜시스가 5년 동안 헨리를 돌보았고 헨리의 부모는 이 기간 동안 헨리를 단지 몇 번 보았을 뿐이다. 어린 헨리는 자신의 부모를 거의 알지 못했고 이것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1854년 헨리가 뉴욕 로체스터에서 가족과 재회하면서 온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와 두 동생과 더불어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 큰 ‘가족’을 이루며 한 집에 살았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하루에 16~18시간 정도로 쉴 새 없이 일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3
1855년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화잇 가족은 로체스터에서 미시간 주 배틀크릭으로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 헨리는 난생 처음으로 가족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집에는 가사와 아이를 돌보는 누나뻘 되는 소녀 한두 명이 있고 가끔 조부모가 집에 와 계시는 정도였지만, 헨리는 더 이상 12명이나 되는 인쇄업자와 교정자, 식자공, 제본 기술자와 집을 함께 쓰지 않아도 되었다. 사실 부모가 장기간 집을 떠나 있을 때가 여전히 많았지만 이제 헨리와 그 동생들에게는 집, 그들만의 집이 생긴 것이다. 엘렌 화잇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배틀크릭으로 이주한 때로부터 주님께서 우리의 포로를 되돌려 주기 시작하셨다.”4
교회 조직을 위한 하나님 계획에는 가족 단합과 안정도 포함되었고, 교회가 완전한 조직을 갖추어 나가도록 인도하시면서 그분께서는 헨리 화잇과 동생들에게 가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을 주셨다.
경제적 안정 : 메리 제인 (워커) 러프버러(1832~1867)
1851년 메리 제인 워커는 존 노톤 러프버러와 결혼했다. 존은 가옥 도장 업자로 주말에는 일요일 준수 재림교인 앞에서 설교를 했다. 그는 창문 자물쇠상이기도 했다. 결혼 1년 만에 메리와 존은 제칠일 안식일을 받아들이고 뉴욕 로체스터에서 신자가 되었다. 존은 설교에 전념하는 것이 의무라고 느꼈지만 메리는 재정을 걱정했다. 남편이 뉴욕 주 서부 지역의 여러 마을로 설교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메리는 복잡한 감정 속에서 남편과 ‘이별’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하이오, 미시간, 일리노이, 위스콘신과 같은 다른 주로도 가게 되면서, 떨어져 있는 기간이 더욱 길어졌다.
존이 받는 ‘수당’이라고 해 보았자 코트와 사과, 감자 몇 자루, 고기, 가끔 받는 1달러가 전부였다. 1856년 좌절하고 낙담한 메리와 존은 로체스터에서 빠져나와 아이오와 주 와우콘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존은 다시 건축업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셨고, 극적인 조처를 취하셔서 제임스와 엘렌 화잇을 보내 그들이 다시 봉사를 하도록 격려했다. 이에 마음이 움직인 메리는 존에게 다시 설교할 것을 눈물로 간청했다.
1859년 1월 16일 배틀크릭 교회는 ‘체계적인 자선’ 계획을 가결하여5 설교자에게 정기적인 보수를 줄 방법을 마련했다. 하나님께서 메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주셔서 교회가 조직화되도록 계속해서 인도하셨다.
상호 신뢰 : 조셉 베이츠(1792~1872)
베이츠 ‘신부’는 재림교회에서 나이 많은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선장이자 선주였던 베이츠는 책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때로는 청년 지도자, 특히 제임스 화잇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접을 잘 해 주지 않았다. 다른 설교자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사역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료 설교자들의 사역을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이츠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다. 1855년 회의를 주재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회의에서 결국 매 안식일의 시작과 끝의 기준을 변경하자는 권고를 표결로 승인했다. 개인적으로 베이츠는 안식일의 정확한 시작과 끝이 오후 6시라고 오랫동안 주장했다. 하지만 대신 일몰로 볼 것을 권고한 회의의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존 O. 칼리스 장로는 베이츠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다정한 사람으로 ‘불평’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6
교회를 조직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지속되었다. 힘겨운 싸움일 때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초창기에 상호 신뢰와 협동의 분위기를 조성하셔서 교회를 육성하시기 시작했다.
스탠리 D. 히커슨
현재 엘렌 G. 화잇 유산 관리 위원회에서 편지 및 원고 사업의 주석자로 봉사하고 있으며 미국 미시간 주에 거주하고 있다.
1. 엘렌 G. 화잇, , 118쪽
2. 엘렌 G. 화잇, <엘렌 G. 화잇 자서전(Life Sketches)>, 121쪽
3. 엘렌 G. 화잇, <영적 선물(Spiritual Gifts)> 2권, 204쪽
4. 엘렌 G. 화잇, <엘렌 G. 화잇 자서전(Life Sketches)>, 159쪽
5. 애드벤티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Feb. 3. 1859, 84쪽
6. 리뷰 앤드 헤럴드, Aug. 16. 1923, 8쪽
조직 결성을 결정하다
1860~1863년
초창기 안식일 준수 재림교인들은 지역 단위를 넘어서는 교회 조직은 처음에는 무조건 다 반대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밀러주의 설교가인 조지 스토스의 말이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그는 1844년 초 이런 글을 남겼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교회 조직은 무엇이든지 조직하는 순간부터 바벨론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주요인 때문에 초기 안식일 준수 재림교인들은 결국 조직을 설립하고 흩어져 있는 회중을 조화롭게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이들 운동의 수적 증가와 지리적인 확산으로 야기된 실제적 문제 때문이었다. 1860년대 초까지 뉴잉글랜드 전역과 아이오와, 위스콘신 같은 서부 지역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회중이 몇 군데 흩어져 있어서 내버려 두었다가는 분명 지역 회중주의와 교리적 논쟁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교회의 조직화를 촉진시킨 또 다른 요소는 모든 교인의 연합을 교리적으로 이해한 것이다(요 17:20~23; 골 12:12~30; 엡 4:11~16 참고). 그것은 각 지역 교회 안에 그리고 동시에 모든 지역 교회 위에서 기능할 수 있는 교회 조직 모델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1850년대) 지역 교회를 위한 특정 지도자들을 선출한 후, 이들 대표자들이 지역 지도자들과 총회 지도자들을 최초로 선출하면서 조직화 과정이 계속되었다.
신생 교회의 명칭
조직 과정에서 출판 사업과 나아가 교단 자체의 공식 명칭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60년 10월 1일,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서 열린 대총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우리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 부르기로 가결함.” 그 후 엘렌 화잇 여사는 “우리가 공언하는 바와 일치하고,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고, 우리를 독특한 백성으로 구별해 주는 그런 명칭 외에는 어떤 명칭도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라는 명칭은 우리의 믿음의 특성을 눈에 띄게 나타내 주고, 의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것이다.”1
조직의 확립
지역 단위를 넘어선 교회 조직을 확립하기 위한 최초의 주요 단계는 주 단위 합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1861년 10월, 최초의 재림교회 합회가 미시간 주에서 조직되어 J. N. 로프보로 와 모세 훌, M. E. 코넬이 합회 위원이 되었다. 1862년에는 남부 아이오와(3월 16일), 북부 아이오와(5월 10일), 버몬트(6월 15일), 일리노이-위스콘신(9월 27일), 미네소타(10월 4일), 뉴욕(10월 25일)의 합회가 설립되었다. 1863년 1월 25일, 남부 아이오와와 북부 아이오와 합회가 하나의 아이오와합회로 통합되었다.

1860년 10월 1일 :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서 개최된 대총회 회의에서 다음의 결의안을 채택함. “우리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 부르기로 가결함.”
1861년 10월 : 미시간 주에서 최초의 합회를 결성하고 J. N. 러프버러와 모세 훌, M. E. 코넬을 합회 위원으로 선출함.
교회 조직 과정은 주 합회의 활동을 총괄하고 감독하는 대총회가 확립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1863년 5월 20~23일에는 뉴욕, 오하이오, 미시간, 위스콘신, 아이오와, 미네소타에서 온 대표단이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 모여 대총회 헌장을 만들고 임원을 선출했다. 교회 조직의 대표적인 형태를 채택하고, 여기에서 다양한 주 합회가 보낸 대표단이 1년에 한 번씩 대총회 임원을 선출하기로 했다.
초대 대총회 회장에 제임스 화잇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지만, 조직의 설립을 도운 그의 의도가 오해를 사지 않도록 그는 회장직을 거절했다. 결국 존 바잉톤이 화잇 대신 선출되었다. 우라이아 스미스와 S. E. D. 워커가 각각 대총회 서기와 재무부장이 되었다. 행정 위원회는 제임스 화잇, 존 바잉톤, J. N. 러프버러 , J. N. 앤드루스, G. W. 아만돈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1863년 중반까지 재림교회에 지역 교회, 주 합회, 대총회라는 세 단계 조직이 결성되었다. 연합회와 지회는 20세기 초반에 가서야 추가되었다.
연합하기
엘렌 화잇 여사는 조직 구조를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단계에서 꼭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시대의 종말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각각 어떤 종교적인 조직체에서 떠나 독자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라는 사상을 조장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이 사업에는 각 사람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주께로부터 교훈받았다. 하늘의 별들은 모두가 법칙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서로 영향을 주고, 그들의 운행을 통제하는 법칙에 순종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업이 건전하고 튼튼하게 발전하려면,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연합해야 한다.”2
알베르토 R. 팀 박사
브라질 태생으로 최근 엘렌G. 화잇 재단 부국장이 되었다. 아내 메릴 사이에 아이 세 명을 두고 있다.
1. 엘렌 G. 화잇, <교회증언> 1권, 223, 224쪽
2. <교회증언> 9권, 2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