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생활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도움이 절실한 곳에 재림교회가 간다
켈리 차이코프스키
재킷과 부츠를 착용하니 몸이 따뜻해지고 바람과 흙먼지도 차단됐다. 아침 식사 후라 배도 불렀다. 차문을 열고 나가자 이 추운 날에도 50명이 넘는 사람이 나를 에워쌌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떠드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 문화가 뒤섞인 진풍경 속에서 마치 내가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 걱정과 기대가 섞인 표정의 부모들 그리고 수줍어하면서도 웃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반팔 티셔츠, 샌들 등 가벼운 여름 복장이었다. 그러면서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일요일 아침에 우리가 뭘 가져왔나 보려고 모였다. 허기진 배를 채워 줄 음식일까? 어쩌면 발을 따뜻하게 지켜 줄 신발일까? 우리 팀은 가져온 물품을 질서 정연하게 나눠 주기 위해 체계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처럼 절박한 사람이 워낙 많이 몰리다 보니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오늘 나눠 준 피자 100조각은 5분 만에 동이 났다. “더 주세요! 더 주세요!” 아이들이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오늘은 더 줄 게 없다.
우리는 교인, 청년 모임, 학생 그리고 지인들이 기증한 재킷과 스웨터, 바지, 신발 등을 모아 온다.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그들은 요청을 외면하지 않았다. 크기가 맞진 않아도 사람들은 가져온 옷가지들을 고맙게 받는다. 신발이 너무 작거나 커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옷으로 몸을 감싸면 추위로부터 따뜻함을 지킬 수 있다. 물론 실망한 사람도 생긴다.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수량이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 아이는 신발을 받았지만 그의 형제는 못 받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시골 마을일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중동의 어느 도시나 아이티의 잊혀진 정착촌일까? 아니다. 여기는 미국 조지아 주에 위치한 도시 클라크스턴이다. 애틀랜타에서 겨우 16킬로미터밖에 안 된다. 클라크스턴은 미국에서 난민을 수용하는 도시로 가장 유명하다.
우리가 돕는 사람은 상대적 침묵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재림교인 난민 가족들이다. 그들은 전쟁과 종교 박해 때문에 고국에서 도망쳐 나왔다. 안전을 위해 미국으로 피신해 온 흩어진 가족들이다. 과거에 집단적으로 테러를 경험한 그들은 말이 없었고, 무기력해 보였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신앙과 그들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선 우리 같은 사람뿐이다. 정부의 지원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분의 손이 되고
우리는 ‘프리(FREE)’1라는 조직에서 활동한다. 그 이름에는 ‘난민의 교육과 권리 신장을 위해 모인 친구들(Friends of Refugees Providing Education and Empowerment)’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에 정착한 재림교인 난민들이 교육의 기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몇 명이 모여 처음 시작했다. 우리는 신청서를 작성하여 어린이 15명이 아레테 장학금2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기금은 바닥났고 이 가족들에게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장학금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어야 했다.
나잉은 15살이며 애틀랜타 재림교회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의 여동생 닝은 14살이며 둘루스 재림교회 학교에 다니고 있다. 또 다른 여동생 만 킴은 6살이며 닝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현재 1학년이다. 이들은 불과 4년 전, 태국의 난민 캠프에서 이곳으로 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받았기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총으로 무장한 버마 군인들이 여러 주 동안 정글에 있는 이 아이들을 뒤쫓았다. 아이들은 얼마 안 되는 물과 식량으로 간신히 버텼다. 매일 밤 그들은 이튿날 아침 햇빛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첸 부족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아이들은 기적적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군인들의 총부리에서 벗어났지만 난민 캠프 안에 갇혀 살았다. 탈출에 성공한 다른 가족이 없으면 캠프를 떠나 가족을 찾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애틀랜타 재림교회 고등학교 상급생인 자스민은 카렌 족 출신이다. 그녀의 어머니 도 두우는 버마 정부가 마을을 공격하고 집을 불태울 때 자스민과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을 임신 중이었다. 도 두우는 옷가지 몇 개만 챙겨 피신했다. 총탄과 불길이 비처럼 쏟아지자 마을 주민 수백 명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주 동안 그들은 정글에서 살았고 거기서 도 두우는 쌍둥이를 낳았다. 먹을 것도 기저귀도 담요도 없었다. 쌍둥이들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뭇잎밖에 없었다.
정글을 통해 도망쳤다가 실패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자스민과 그녀의 동생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카렌 족 중에는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도 두우와 자스민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들은 결국 난민촌에서 나왔지만 자스민의 쌍둥이 남동생은 그러지 못하고 현재까지 그곳에 남아 있다. 자스민의 꿈은 간호사가 되어 돌아가 그녀의 부족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다.
자스민의 여동생 데이지는 현재 12살이며 둘루스 재림교회 학교 5학년이다. 그녀는 가장 행복한 소녀 중 한 사람이다. 난민 캠프에 머무는 동안 혈류 장애가 생기긴 했지만 그녀의 신앙심은 대단하다. 매주 화요일, 우리 그룹은 여섯 시간 동안의 혈소판 투입을 위해 그녀를 애틀랜타 어린이 보건소에 데리고 간다.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켈리 아줌마.”라고 말한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통 받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믿음과 약속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 찬 재림교회 신앙을 굳게 붙들었다.
콩고 민주 공화국 출신 난민인 25살 청년 그레고리는 어느 안식일에 우리와 만났다. 그는 이웃 사람들을 데리러 온 우리의 안식일 차량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밖에서 2시간 동안 서 있었다. 나이 많은 아버지와 6살 조카와 함께 기다린 그는 이미 자리가 꽉 찬 차량으로 다가와 우리가 제칠일안식일재림교인인지를 물었다. 그는 우리가 다른 재림교인들을 태워 가는 것을 줄곧 지켜보았으며 자기 역시 재림교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웃으면서 아이들을 밀착시켜 그가 탈 공간을 만들었다. 현재 그레고리는 재림교인이 많이 거주하는 이웃 마을로 옮겨 가족 8명과 살고 있다.
그분의 발이 되어
작은 프로젝트로 시작한 ‘프리’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이제 많은 교회와 개인들이 동료 형제자매를 위해 마음과 뜻을 모으고 있다. 이에 대해 참으로 감사드린다. 주님께서 계속 문들을 열어 주셔서 ‘프리’도 계속 전진할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현재 전 세계에서 모인 난민 아동과 가족을 돕고 있다. 어린이 14명이 재림교회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급했다. 식량과 의복을 마련하고 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 행사를 벌이고 영어 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어른과 아이들이 의료 혜택을 받게 해 주고 직업 훈련의 기회도 만들어 주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기증받은 식품과 의복 및 다른 생필품을 보관할 건물이 클라크스턴에 필요하다. 이 건물이 생기면 의사들이 와서 진료할 수 있고, 3백 명이 넘는 재림교인 난민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인 그들의 당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자력으로 일어서게 돕는 것이 ‘프리’의 일이지만 우리 혼자서는 해낼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업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켈리 차이코프스키
전문 치료사.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 다섯을 둔 어머니이다. 조지아에 살고 있다.
1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면 www.freerefugees.org를 방문해 보라.
2 아레테 장학 기금은 저수입 가정을 위해 미국 조지아 주 세금 공제 장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정부 인가 학생 장학 기관이다.
사진 설명
1. 사람은 많고 할 일도 많다.
2. ‘프리’를 통해 알게 된 아이들
3. 프래디는 신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