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유럽의 재림교회
1877년 고국 덴마크에 도착한 존 매트슨(John G. Matteson)은 트랜스-유럽지회 지역에 온 첫 번째 재림교회 선교사가 되었다.
시작
그는 1835년에 덴마크에서 출생했고 1854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1863년에 재림교인이 되었다. 그해 말 그는 <리뷰 앤드 헤럴드>지에 “재림 기별을 땅끝까지”1 전해야 한다는 호소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그는 재림교회 소책자들을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로 번역하고 <재림의 징조>지를 창간하는 등 이주민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1870년대 중반까지 800여 명의 덴마크, 노르웨이 이주민 재림 신자는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재림교회 출판물들을 고국의 친척들에게 보내서 스칸디나비아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인지도를 높였다. 점차적으로 매트슨은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일할 뿐 아니라 고국에서 봉사하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마침내 꿈은 실현되었다. 그는 1877년부터 11년 동안 고국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였다. 그는 빡빡한 여행과 설교 일정을 소화하며 <시조>를 출간하였고, 출판소를 설립하였으며,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어 찬미를 일부 수록한 찬미가를 편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888년부터 악화된 건강 때문에 미국으로 복귀하여 1896년에 사망한다. 그가 선교지에 있는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 그리고 노르웨이에는 여러 합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901년에는 핀란드와 아이슬란드 대회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연합회가 조직되었다.
매트슨이 스칸디나비아에서 봉사할 때, 미국에 왔던 또 다른 이주민 윌리엄 잉스(William Ings)가 1878년 고국 영국에 도착한다. 그는 원래 스위스에 있던 J. N. 앤드루스(Andrews) 밑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지만 영국에서 보낸 2주의 휴가 기간 동안 두 사람을 안식일 진리로 인도하였다. 그의 성공이 계기가 되어 그해 12월 30일, 대총회는 J. N. 러프버러(Loughborough)를 영국에 선교사로 파견한다.
러프버러는 북미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유명한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매우 성공적인 전도자였다. 그러나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미국에서 건너온 소수 종교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했다. 미국으로 복귀하기 직전이었던 1883년에 그는 겨우 교인 19명으로 구성된 첫 번째 영국 재림교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다음 해에 영국에서는 <현대진리>지가 출간되었지만, 1898년까지 영국에는 합회가 조직되지 않았고, 20세기가 될 때까지 교인 수가 1,000명을 넘지 못했다.
엘렌 화잇은 1885년에서 1887년 사이에 유럽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1887년 6월 노르웨이 모스에서 개최된 장막 부흥회에서 설교했는데 이는 북미 지역 밖에서 열린 최초의 재림교회 장막 부흥회였다. 엘렌 화잇은 영국을 3차례 방문하여 재림 신앙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영국 사회에 깊은 기독교 바탕과 잠재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전에 동참했던 미국 재림교회는 영국 교회 사업을 위해서 가장 우수한 일꾼들을 파견했는데 그 가운데는 S. N. 해스켈(Haskell), E. J. 와그너(Waggoner), W. W. 프레스콧(Prescott)이 있었다. 그리고 대총회장 A. G. 다니엘스(Daniells)는 1902년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26년까지 영국연합회장은 모두 미국인이었으며, 윌리엄 H. 메레디스(William H. Meredith)가 영국 재림교회를 이끄는 최초의 영국인이 되었다.
교회 조직의 발전
1909년에 출범한 유럽지회는 1929년에 3개의 지회, 즉 북유럽, 중앙유럽, 남유럽지회로 분할되었다. 북유럽지회(NED)는 폴란드를 비롯해 동서 아프리카에 걸쳐 있는 광대한 영국 식민지를 포괄하였는데, 1951년에 재편되면서 프랑스 식민지는 단기적으로 그리고 네덜란드령은 항구적으로 추가되었다. 1971년 다른 두 유럽지회는 유로아프리카지회로 통합되었고, 북유럽지회는 서아프리가 지역이 유일한 아프리카 선교 지역임을 고려해 북유럽서아프리카지회라는 명칭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1980년 두 개의 서아프리카 지역 연합회가 조직된 뒤에 북유럽서아프리가지회는 다시 북유럽지회라는 명칭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86년 1월 1일, 트랜스-유럽지회(TED)로 이름을 변경한다. 트랜스-유럽지회의 선교 범위는 서쪽의 그린란드로 시작해서 동쪽의 파키스탄에 이르고, 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극권 한계선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적도의 탄자니아에까지 이른다. 트랜스-유럽지회의 광활한 지리적 범위와 문화적 다양성은 세계 교회 내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선교적 열정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강렬한 소망은 북유럽지회 재림 신자들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데도 개방적이다.
예를 들면, 1898년 영국합회가 조직되었을 때, 그들은 여신도 에디스 아담스(Edith Adams)를 총무 겸 재무로 선출하였다. 핀란드에서도 초기부터 여성들이 “전도와 교회 사업의 여러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940년대부터 1950대까지 엘제 루우카넨(Else Luukkanen)은 핀란드 전역에서 전도회를 인도했고 그 결과 “수백 명이 회심하여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2 또한 북유럽지회는 오드리 안데르손(Audrey Andersson)을 지회 총무로 선출함으로써 여성 임원을 둔 최초의 지회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유럽 재림교인은 해외 선교를 위해 엄청난 열정을 쏟아 왔다. 1902년 영국연합회가 조직되기도 전에 그들은 동서아프리카의 넓은 영국 식민지 선교의 책임을 짊어졌다. 1906년 스칸디나비아연합회가 조직된 지 5년 만에 그 지도자들은 에티오피아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선교의 발전 속도는 더뎠다. 그래서 북유럽지회 행정 위원들은 첫 번째 행정 위원회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위임된 지역의 백성들에게 재림 기별을 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복음을 듣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더 큰 사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결의했다.3 그 당시 북유럽지회 내에서 침례 받은 재림교인 2만 4,228명 가운데 13.2퍼센트에 해당하는 3,202명이 아프리카에 있었다. 그러나 1980년에는 지회 내 12만 8,644명 가운데 67.9퍼센트에 해당하는 8만 7,389명이 아프리카의 두 연합회에 속하게 된다. 하나님은 북유럽지회의 선교적 열정에 복을 베풀어 주셨다.
유럽의 기독교 쇠퇴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프리카에서 유리 교회에 일어나는 변화는 고무적이다. 아프리카 교회들의 성장과 자립은 초기 선교사들의 바람이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소식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교회의 확장과 발전을 기리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유럽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낯선 땅에서 궁핍과 고립 그리고 당시에는 치료법이 없었던 열대병과 마주해야 했던 그들의 헌신은 실로 위대하였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들의 헌신을 거의 잊고 있다.
결론
편견, 전쟁, 세속주의, 무관심, 경제적 어려움, 신학적 논쟁 그리고 여러 장애에도 불구하고 셋째 천사의 기별은 유럽 땅에 뿌리를 내렸다. 북유럽지회 내의 첫 연합회였던 스웨덴연합회가 조직되었을 때, 유럽의 재림 신자는 4,079명이었고, 인구 비율은 6만 2,600명 당 한 명 꼴이었다.
2012년 말 트랜스-유럽지회 내의 교인 수는 8만 2,769명이며 인구 비율은 약 2,500당 1명 수준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유럽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의 역사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신뢰하며 선교적인 열정을 지속시킬 때에 그들은 새로운 도전에도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트림, 대총회 자료 통계 연구소 소장이다.
1. <Review and Herald>, Nov. 10. 1863., 191쪽
2. Hugh Dunton, Ronald Strasdowsky et al., eds., <Heirs of the Reformation : The Story of Seventh-day Adventists in Europe>(Grantham, Eng. : Stanborough Press, 1997), 32, 96쪽
3. NED Winter Council, 1928, minutes, 3, 6,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