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며
제럴드 A. 클링바일
“전문 음악가가 되고 싶어.” 드럼을 치는 친구 조지가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 앞으로 무엇을 할지 이야기를 나누며 말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지에게는 확실한 계획이 있었다. 다른 친한 친구인 알레얀드로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다른 친구들도 이미 경영이나 IT 분야에서 진로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나는 침례 받은 지 2년 반이 지난 재림 신자였다. 교회 울타리 속에서 자랐고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1981년 1월 어느 안식일 오후에 내린 이 결심은 특별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다. 단순히 부모님의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반에서 유일한 재림교인이었던(사실 우리 학년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은 단 두 명이었다.) 나는 내 신앙을 위협하는 순간을 절묘하게 피해 가야 할 때가 많았다. 학교생활과 특별 활동 시간에 완전히 빠져들 때도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중대한 의문

한 번에 한 걸음씩 : 암벽을 등반하려면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고 조금씩 발을 떼야 한다. 이것은 인생의 지도를 따라가는 우리에게도 유용한 지침이다.
침례를 받은 후 여름 방학에 3주 동안 청년 선교 캠프에 참가했다. 3주 동안 신선하고 흥미로운 방법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마지막 주 음악회를 위해 작곡을 하고 가사도 만들면서 연습했다. 매일 콘스탄스 호숫가에 위치한 도시 린다우에서 행인이 북적거리는 곳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났다. 음악, 팬터마임, 팸플릿 등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찾았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고 종종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에 놀라기도 했다. 그 3주는 사도행전 시절처럼 느껴졌다. 이 경험 뒤에 예수님과 함께 걷는 나의 행로가 바뀌었다. 그 여름 이후 동생과 함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음악 선교를 시작했다. 이 사역은 10여 년간 계속되었고 거기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수천 명과 감동을 나눴다.
3년 후에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통과했다.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풀타임 사역자로 주님을 섬길 것인가? 갈등이 되었다.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 치료 쪽도 생각해 보았고 봉사에 관심이 있어서 의학 공부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아버지는 모두 재림교회 목사였다. 목회자 자녀의 삶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과연 내가 목회라는 ‘가업’을 잇고 싶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 사역에 든든한 후원자인 어머니는 목회자의 길은 반대했다. “목회는 만만한 일이 아니란다.”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삶을 다 쏟아야 하거든.”
여름 미션 캠프 이후 합회 청소년부장 베르네르 렌츠는 나에게 친구이자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멘토가 되었다. 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의 선택에 대해 답답한 마음을 말했더니, 그는 중요한 제안을 했다. “제럴드, 하나님께서는 자네의 미래에 관심이 있으셔. 이러한 의문도 잘 알고 계시지. 하나님께 올바른 길을 보여 달라고 함께 매일 기도해 보지 않겠나? 그분의 팔은 그렇게 짧지 않다네.” 그때부터 2년 동안 나는 기도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다.
사회 경험
1984년 독일에서 건강한 젊은 남자는 병역 의무가 있었고 15개월간 훈련을 받으며 복무해야 했다. 재림교인을 비롯하여 기독교인 대부분은 차라리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럴 경우 민간인으로 18개월간 대체 복무를 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생은 면제가 된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잘 몰랐었고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2개월 뒤 사회 현장에서 대체 복무를 시작했다. 나는 집 근처 병원에서 간호보조사로 일했다. 교실에만 있다가 사회로 나와 보니 다양한 사람과 일하면서 매일같이 죽음을 접하고 교대 근무를 하는 것이 힘들고 진이 빠지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지역 교회에서 음악 사역 봉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네르는 나를 만날 때마다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 답을 못 받았다. 하나님께서 느긋하게 내가 영적인 인내심을 기르도록 도와주시는 것 같았다. 이것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계속해서 기도하고 기다렸다.
산속으로
그 후 1년 2개월 동안 여전히 기다렸다. 몇 시간이고 미래를 생각하고 기도했다. 혼자서 하기도 했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침묵하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대체 복무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2주간의 휴가가 남아 있었다. 때는 10월 초였다(유럽은 가을이다.). 절친 바티아스와 함께 스위스 알프스 산을 오르기로 했다. 현금은 거의 없었지만 꽉 채운 배낭 둘과 쇠막대기를 쓰는 구식 텐트에다 엄청난 열정으로 무장하여 스위스 그라우뷘덴에 있는 세인트모리츠까지 히치하이킹을 했다. 첫 번째 주는 더없이 좋았다. 파란 하늘, 화창한 날씨, 추운 밤, 얼음처럼 찬물과 함께 올라야 할 높은 산이 우리를 반겼다. 일주일 동안 3천 미터가량을 등정했다.
금요일 오후였다. 안식일을 보내고 싶은 지점까지 가기 위해 가파른 길을 헉헉거리며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날씨가 변했다. 구름이 빠르게 산을 덮었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때가 가을임을 실감했다. 산 정상 근처에 빙하가 녹아서 만들어진 호수까지 도착했다. 곧바로 쇠막대를 하늘로 향하게 세워 텐트를 치고 침낭도 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얼음물에 몸을 담그고 따뜻한 수프를 먹으면서 안식일을 맞이했다. 5일 동안의 강행군을 끝내고 맞는 편안한 안식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곧 잠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실 때

세상을 껴안다 : 필자와 친구 마티아가 또 다른 자연 탐사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한밤중 잠에서 깨었을 때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무방비로 노출된 지역이라서 더 위험했다. 작은 텐트를 빗줄기가 사정없이 때렸다. 하늘에서는 쉬지 않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번갯불과 천둥 사이의 시간 간격을 재다 보니 폭풍우가 바로 우리 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겁이 났다. 침낭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직 젊다고 할 수 있는 그 나이에 난생 처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산꼭대기 근처인 데다가 쇠로 만든 텐트 막대가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번개를 끌어들이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번개를 맞은 후 이 주위가 어떨지 상상이 되었다. 사방이 어둡고 비는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숨을 곳은 없었다.
얼마나 오래 꼼짝도 못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왠지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몸과 마음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1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딸칵’ 하며 무엇인가 나의 내면을 건드렸다. 그리고 갑자기 봇물 터지듯 마음의 문이 열렸다. 나는 하늘과 땅, 천둥과 비, 삶과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주님께 나의 마음을 드렸다. 내 삶을 짚어 보고 생각과 행동을 저울질했다. 인생의 수호자 되신 분에게서 나를 분리시키는 모든 것을 고백했다. 그런 다음이었다. 그리 길게 고민할 새도 없이 나는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주님, 제가 전담 사역자가 되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아멘.’이라고 말할 때 이 폭우를 멈추어 주세요.”
어떻게 이런 말이 나왔을까? 몇 주 동안 그 문제는 접어 두고 있었다. 휴가를 즐기며 신 나게 산을 올랐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멘으로 기도를 마치고 있다.
엄청난 고요가 우리의 작은 텐트를 집어삼켰다. 마치 누군가가 스위치를 끈 것처럼 천둥과 번개, 비가 멈추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했다! 고도 약 3천 미터 알프스 산 위에 누워서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다. 친구를 흔들어 깨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방금 하신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그분의 아이가 절망에 차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분은 내 미래에 관심이 있으시고 나에게 행군 명령을 내리셨다.
2중 기적
그 산에서 참으로 좋은 안식일을 보냈다. 안개가 부드럽게 우리 텐트를 감싸 안은 가운데 우리는 몇 시간이고 함께 이야기하고 기도했다. 다음 날 아침, 등반을 계속했다. 날씨가 변했다. 막 겨울이 시작되어 우리를 둘러싼 웅장한 산 정상에 눈발이 날렸다. 이제 밤이 더 추워졌다. 다시 문명 세계로 내려와 냄새나는 배낭 여행자 두 명을 기꺼이 집까지 태워 줄 마음씨 좋은 운전사들을 만나 집으로 돌아왔다.
초조했다. 어머니의 충고를 가슴에 새겨 두고 있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했다. 내가 목회 공부하는 것을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산에서의 경험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뭐라고 말할까? 3층짜리 아파트 집으로 가면서, 또 초인종을 누르면서 조용히 기도했다.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열렬히 나를 안았다. (어머니만이 이렇게 냄새나는 등산객을 안을 수 있으리라.) “어머니, 말씀드릴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아주 놀라운 일을 해 주셨어요.” 입을 열자마자 이 말부터 나왔다. 어머니는 잠시 멈칫 하더니 말을 꺼냈다. “아들아, 너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모른단다. 대체 복무가 2개월도 채 안 남았잖니.” 이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네가 목회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지금까지 내가 뭐라고 해 왔는지 잘 알잖니.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는 것 같구나.”
바로 그것이었다! 내 입이 크게 벌어졌다. 어머니를 껴안은 다음 산꼭대기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함께 울고 웃었다. 우주의 주인께서 대답해 주셨다.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우리 둘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감사의 기도이자 헌신의 기도였다.
그 이유
하나님께서 진군 명령을 내리셨지만 10개월 뒤 오스트리아 슐로스 보겐호펜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할 때까지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았다. 학위를 받기 위해 남아프리카에 갈 때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헬더버그 대학에서는 학위뿐 아니라 아름다운 삶의 동반자도 얻었다. 학업, 재정, 봉사 기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살펴 주셨다.

또 한 번의 등정 : 스위스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아내와 함께 1995년부터 페루 연합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기해야 할 순간들이 있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여러 문화권과 환경에서 봉사하며 마음속으로 그 산 정상을 다시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힘겹거나 의문이 들 때마다 내가 바로 제자리, 곧 그분의 자리에서 그분의 일을 하며 한 번에 조금씩 그분의 나라를 넓혀 나가고 있음을 상기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여전히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부르고 계신다. 부드럽고 작은 음성에 귀 기울일 사람, 그분께서 천둥으로 크게 이야기하실 때에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다. 십 대가 된 딸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긴 여정 속에서 배웠던 교훈을 되새긴다.
먼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나 혼자가 아님을 기억한다. 영적 멘토를 찾는다. 그들의 기도가 우리 기도를 더 강화해 준다. 가능하다면 다른 가족도 끌어들인다. 우리의 팔을 잡아 줄 경험 많은 기도 파트너를 구한다.
둘째, 시간을 내어 나에게 있는 은사를 찾아낸다. 1년 반 동안 병원에서 일하면서 나는 변화를 겪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 나의 한계도 발견했다.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하라. 언젠가 내 아이들도 학생 선교사로 봉사할 기회를 얻으면 좋을 것 같다. 적당히 지내다 오는 곳이 아닌 데서 말이다. 돌아올 때는 변해 있을 뿐 아니라 응답받은 기도의 힘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셋째, 부르심을 받으면 바로 나아가라.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다고 심란해하거나 실의에 빠지지 말라. 인내하되 끈기를 가지라. 하나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에서 방향을 찾으며 그 목소리의 인도를 받으라.
마지막으로,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면서 봉사하는 와중에 어려움에 부딪치거나 권태기에 빠질 때(분명 그럴 것이다!) 지금 바르게 잘 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 왜 여기까지 왔는지 혼란스럽고 의문이 들 때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뿐 아니라 우리가 힘들 때 균형을 잡아 주시고 용기를 북돋워 주신다.
너는 내 것이라
오래전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특별한 부르심을 상기시켜 주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1~3).
반복되는 사울의 경거망동과 이스라엘이 툭하면 우상 숭배에 빠지는 모습을 본 사무엘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하나님임의 속삭이시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예수께서 세관 옆에 서서 “나를 따르라”(마 9:9)고 부르시던 호숫가의 순간을 회상할 때, 세리였던 제자 마태는 무슨 느낌을 받았을까?
사무엘이나 마태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내 인생이 정말 달라졌음은 확실하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부르심으로 인해 나는 과업에 집중하고 교회에서 교제를 나눌 때에도 인간의 단점 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추수할 일꾼이 필요한 수많은 곳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산을 오르거나 강을 건너거나 용감히 불 시련과 맞설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라. 그러고는 달려가라!
제럴드 A. 클링바일
그는 지금도 등산을 즐기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현재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며 아내 샨탈, 세 딸과 함께 미국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