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하나님을 신뢰하자
실비아 렌츠
쿵!
차 문이 세게 닫혔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영구차의 뒤 창문을 통해 밝은 색 소나무 관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장의사가 시동을 걸자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 버렸다! 내 아이가 떠나 버렸다!’
뜨거운 눈물 때문에 안경이 뿌옇게 되었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수개월 동안 이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장의사가 “이제 관을 닫아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고개를 끄덕였었지만, 오래전 소냐가 “주님, 저를 데려가 주세요. 더 이상은 싸울 힘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할 때 속으로는 나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아이가 더 이상 고통에 시달리고 또 다른 테스트 결과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에 안도했지만 내 마음은 울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너무 불공평해. 그 애는 아직 너무 어려! 차라리 내가 대신 죽는 게 나아!”
견디기 힘든 고통
아마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렇게 바랄 것이다. 다윗은 반항적이고 살기 가득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몇 시간 동안 울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하지만 우리가 대신 죽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당신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이것은 아마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일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예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울부짖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자신이 구하기 원했던 이들에 의해 알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하늘과 땅 사이에 들려서 모욕당하고 제자들에게 오해받고 친구에게 배신당했을 때 예수는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 순간 사랑이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비록 짧은 시간이기 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예수께서는 이 잔인한 죽음으로 죽기를 원하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분리의 아픔을 겪으셨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고통 받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랑이 거부당하고 짓밟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죽음이다. 하나님 사랑의 완전한 부재, 그 결과는 완전한 영혼 소멸, 끝, 마지막, 종말이다. 더 이상의 기회도 더 이상의 자비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또 궁극적으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과 또 다른 죽음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마지막 공포의 여동생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적어도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는 돌아올 수 없는 ‘땅’으로 잡아가기 때문에 이것은 그의 언니만큼이나 추하고 무서운 존재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죽음의 경험에는 은혜가 섞여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신음 소리를 듣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을 본 사람이라면, 죽음은 변장한 모습의 자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 고통에 시달리던 몸에 평화가 깃들고 부르튼 입술은 침묵하고 눈은 차분히 감겨진다. 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작별 인사를 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이제 떠나도 돼. 너는 넘어지지 않을 거야. 하나님께서 항상 너를 감싸 줄 거야. 너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잘 지켜질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슬픔의 터널에서 희망과 확신의 장소로 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별
소냐를 씻기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히고 머리를 빗기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챙길 때 우리는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확신과 평안을 느꼈다.
그녀는 백설공주처럼 거기에 누워 있었다. 막 낮잠이 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죽음이 우리의 사랑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사랑은 다른 것들로 영향을 받는다. 더 간교한 ‘살인자들’이 있다. 그것은 무관심, 무례, 상처, 불성실, 시간 부족이다. 혹은 매일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하길 원해. 너는 내게 매우 특별해. 너는 하나님의 위대한 생각으로 태어난 존재야. 나는 네가 계속해서 새로워지기를 바란단다. 너는 내게 너무나 소중해. 네가 여기 있어서 참으로 고마워.”라고 말하기를 잊어버리는 일이다.
비록 소냐가 더 이상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사랑은 내가 틀렸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자료 보관소인 “어린양의 생명책”(계 13:8)에 아이의 모든 것을 기록해 놓으셨다. 전염성 강한 웃음, 죽기 직전까지도 반짝이던 눈, 피아노 건반 위를 춤추듯 옮겨 다니던 가녀린 손 그리고 가끔씩 아이가 던진 유머. “가족 무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묻혔어? 한 10명쯤? 우와! 친목회 만들어도 되겠다. 부활 때 서로 밀어 주고 끌어 주고 하겠네!”라는 말까지도.
우리는 딸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현재의 도착지에서 안전하다. 그녀의 기록은 이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 하나님의 마음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 언젠가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새 생명을 얻고 변형되며 연합하여 고통과 두려움, 이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가장 슬픈 날들 가운데서도 나는 이 사실에 위로받는다.
실비아 렌츠, 독일 알스바흐 핸라인에서 ‘독일 예언의 소리(German Voice of Prophecy)’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녀는 성공한 작가이며 아이들과 어른을 위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실비아와 그녀의 남편 워너 그리고 남은 두 자녀 야네와 마누엘은 2010년 8월 16일에 그들의 딸이며 여동생인 소냐를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