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중요 개념을 재검토하다
프랭크 W. 하디, 리사 비어즐리 하디
태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담뿐이라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모두 히브리어 아담(‘adam)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adam)을 만들고 그(복수 형태)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26절). 남녀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렇지만 토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두 사람을 창조하셨다. 어떻게 두 사람이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면서 서로가 다를 수 있을까? 아니면 둘은 정말 서로 다른 것일까?
차이
우리의 첫 부모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했지만 둘이 모든 면에서 동일하지는 않았다. 신체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정서적인 면은 어떤가?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는 사물을 늘 동일하게 본다는 말이 맞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흥미로운 차이는 아니다. 더 깊은 질문을 하자면, 사회적, 영적 수준에서 남녀는 동일한 방식으로 창조주의 형상을 지니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남녀들은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모에게 주신 인간의 광범위한 특성들을 고려할 때만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다. 남성과 여성 중 한쪽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이 불완전한 것과 같이, 인간에게 깃든 하나님의 형상도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으면 불완전하다.
‘한몸’은 육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 생활이 피상적이고 불만족스럽다. 신체적 연합을 초월하는 사랑의 결혼 관계 가운데 남녀 간의 온전한 연합이 있다. 그것은 육체적 연합을 넘어서 영적, 정서적 수준까지도 포함한다.
이것은 그분의 아들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신약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 혹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묘사한다(고후 4:4; 골 1:15). 그리고 예수께서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즉 “남자아이”로 오셨다. 이 사실은 흥미로운 의문을 자아낸다. 만일 그분이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전부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셨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인간으로 오신 그분께서 드러낸 하나님의 형상은 과연 완전한 것일까?
우리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려면 더 심화된 주석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분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하고 간청하기 위해 거룩하신 연인, 즉 신랑으로 세상에 오셨다. 죄의 문제가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사 53:6)한 것이라면 해결책은 목자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비종교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래서 그분이 오셨다. 이곳에서 단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경멸스럽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기꺼이 당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갈망의 깊이를 보여 준다. 인간 신랑이 신부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분명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필요로 하시며, 그 필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강렬하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 2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받을 필요가 없으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께서 아낌없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아마 우리는 그 의미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필요는 순간의 열망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억제할 수가 없는 무언가에서 나온 것이다. 본질이 사랑이신 분이 피조물을 지으신다면 그 피조물은 사랑을 받고 나서 받은 사랑을 그 근원되시는 분에게 지성적으로 보답할 수 있는 존재여야 이치에 맞다. 우리와 상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은 매우 크다. 그래서 그분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가 존재해야 할 공간이 필요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마른 땅을 만드셨다.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야 하므로 그분께서는 대기를 만드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부모가 되신 이후 우리와 함께 지성적인 교제를 누리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여기 놓치지 말아야 할 요점이 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창 2:2). ‘일곱째 날 직전’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마쳤다고 성경은 말한다. ‘천지’의 완성과 우리 첫 부모와 교제를 나누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제쳐 두셔야 했다. 그분의 온전한 목적이 성취되는 것은 자신의 일을 중단하심으로써였다. 일곱째 날에 그분께서 마침내 지적으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는 상호 관계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안식일의 의미가 있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으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차이를 지니고 있는 그 누구, 우리를 보완해 줄 수 있는 그 누구를 사랑하고 찾는 것이 하나님 형상의 일부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사역의 핵심은 그분의 하나 됨 자체에서 나타난다. 그분은 오직 다른 존재를 통해서만 채울 수 있는 필요를 해결하고자 오셨다.
우리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말이 아니라,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한계 상황 때문에 상호 관계와 나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이 한 가지 사실이 동시에 요약해 준다.
남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개성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부여받았다. 비록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각 사람은 육체, 정신, 혼의 불가분적인 통일체로서 생명과 호흡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의 시조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했으며, 하나님 아래에 있는 그들의 고귀한 지위에서 타락했다.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그들은 사망에 예속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이런 타락한 본성과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통회할 때 그들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간에 사랑하며 자신의 환경을 돌보도록 소명 받았다(창 1:26~28; 2:7; 시 8:4~8; 행 17:24~28; 창 3장; 시 51:5; 롬 5:12~17; 고후 5:19, 20; 시 51:10; 요일 4:7, 8, 11, 20; 창 2:15).
프랭크 W. 하디, 리사 비어즐리 하디
프랭크는 최근에 은퇴하였다. 리사는 대총회 교육부장이다. 그들은 미국 메릴랜드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