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신앙과 과학의 교차점 연구
로니 날린
하나님이 우주와 생명의 창조주라는 주장처럼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제기되는 개념도 드물다. 성경은 처음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로 시작해서 “나는…처음과 마지막이요”(계 22:13)라고 마친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만물을 존재하게 한 원인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에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명료함은 자연 기원 모델과 대립한다. 일반 학문 영역에서는 ‘창조주 하나님’ 개념이나 신이 자연에 개입할 가능성을 용납하지 않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주인일 뿐 아니라 그 과정에 능동적이고 의도적으로 개입하는 분이다. 이런 개념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에서 명확하게 전달된다. 거기서 하나님의 역할을 설명하는 동사들은 능동태로서 직접 목적어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창조 수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해도 그 창조의 방법은 또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에 사용된 과정에 대하여 어떤 통찰을 제공하고 있는가? 욥기는 하나님의 창조가 전개된 방법을 이해하기에는 인간에게 지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엘리후는 욥과 대화하며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일을 행하”(욥 37:5)신다고 강조하였다. 나중에 하나님 자신도 창조의 경이로움을 여러 예를 들어 제시하신다(38~41장).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은 욥의 시인을 끌어내신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해력의 부족은 자발성이나 노력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단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엘렌 화잇은 이런 개념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진술하였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어떻게 창조 사업을 성취하셨는지 결코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분의 창조력은 그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렵다.”1
그러나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품성과 피조물들에 대한 그분의 이상에 좀 더 친숙해지는 방법의 하나로 천연계를 다각적으로 관찰하도록 끝없이 촉구한다. 예를 들어 다윗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시 8:3) 명상할 때에 그에게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설명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의 과정에는 접근할 수 없을지라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탐구하고 배울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도전적인 질문을 통해 욥을 낮추셨던 말씀에서 이러한 양면성에 주목해야 한다. 욥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한 하나님은 그의 관심을 관찰 가능한 창조 세계의 위대함으로 이끄셨다. 엘렌 화잇은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서 과학의 이러한 기능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진술로 확인하였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도 아래에서 그분이 만드신 것들을 연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의사에 일치된 생각을 가질 수가 있다.”2
양극단의 조화
우리가 세상의 기원을 탐구하려 할 때 성경이 그 주제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지 고려한다면 세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양극단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신을 배제시킬 위험성이 존재한다. 과학적 방법은 어떤 물리적 현상과 작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지식은 창조주에 대한 경이와 감사의 정신을 끌어내기보다는 잘못된 지배 의식 내지 자기 의존으로 흘러간다. 어떤 현상이 어떻게 작용되는지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이해한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간과하면 우리는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라는 첫째 유혹의 덫에 걸려든다(창 3:5 참조).
반면 정반대 영역에서 과학은 하나의 위험한 금기 사항이다. 여기서 과학적 연구는 의혹의 대상이다. 이런 태도는 종교가 마치 인류를 무지에 가둬 두고 억압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게 한다. 사탄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물었을 때 그는 유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상하게 비춰지도록 시도했다. 이러 미묘한 질문을 통해서 뱀은 하나님이 모든 과실을 먹을 수 있도록 나무를 심었지만, 인간이 그것을 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처럼 암시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하여 토론할 때에 우리는 이 같은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이어지는 글은 이러한 정신에 바탕을 둔, 제한된 인간의 관점에서 쓰여진 과학적 제안이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창조 형태에 관하여 첫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명령(fiat)’에 의한 창조이다. 라틴어 ‘피아트(fiat)’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완전한 기능을 갖춘 체계의 등장을 암시한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조물의 존재가 나타났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이런 개념은 성경의 다른 책에서도 강조된다. 예를 들어 시편 33편 6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반면 우리는 신생아가 출생하기까지 새로운 생명의 형성 과정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예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명령’에 의한 창조와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도록 법칙들을 세우시고 그것들을 통해 일하실 뿐, 여전히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창조물들은 고정적인가? 아니면 가변적인가?
창조에 잠재되어 있는 두 번째 난제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완전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주에서 관찰하고 있는 수많은 것은 복잡한 과정과 변화 그리고 역사를 내포하는 유동적인 체계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죄의 결과일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피조물들이 불변의 상태로 고정되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어류와 조류 그다음 인간에게 주어진 다음의 명령은 이러한 사실을 암시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창 1:22).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절). 여기서 사용된 동사들은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성장과 확장의 가능성을 부여하셨음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의 역동적인 체계의 세계를 구상하셨음이 분명하다. 반면 창세기는 천연계의 어떤 변화는 죄의 유입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창 3:14~19 참조).
변화의 원인이 무엇이든, 오늘날 관찰되는 많은 것, 예를 들면 달 표면의 충돌 분화구와 같은 것들은 과거에 여러 과정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피조물들이 창조 후에 변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개념을 수용하면 우리가 지금 관찰하는 모든 것이 창조의 원래 상태를 온전하게 반영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인가?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부터의 창조인가?
창조에 대한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질문은 하나님이 이전에 존재하는 물질로 작업하시는지 아니면 어떤 재료 없이도 무로부터(ex nihilo) 세상을 만드실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할 능력이 있으며 정말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확증한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 17; 히 11:3 참조). 그럼에도 창세기는 하나님이 미리 존재하는 물질로도 피조물을 창조하신다고 기록한다. “땅의 흙으로”(창 2:7) 지음을 받은 인간이 대표적이다.
결정론과 자유 의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한 마지막 질문은 그분의 통치력이 그분이 창조한 세계의 작동 체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강물에 휩쓸려 가는 모래 알갱이의 구체적인 궤적으로부터 부모 세포의 염색체에서 전달된 유전 물질의 정확한 재조합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의 발생을 의도적으로 결정하시는가? 이것은 특히 인간의 자유 의지와 천연계에 나타나는 악의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다.
신약은 예수님을 우주의 보존자로 묘사한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이 말은 하나님 없이 세상이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유지는 결정과 다르다. 하나님은 만물이 존재하도록 설정하시고, 어떤 현상에서 다양한 결과가 발생할 기회를 주실 수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법칙은 이런 결과의 일부분을 통제한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사전에 예측할 수 없다. 이렇게 어떤 일이 발생할 두 가지 경우를 흔히 ‘필연’과 ‘우연’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비인격적인 용어는 이 세상이 하나님 없이 작용하는 기계적인 세계라는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필연’과 ‘우연’은 하나님이 사실상 자유 의지가 가능해지도록 허용하신 의도적인 방법일 가능성이 크다.
믿음의 문제
결론적으로 과학적 탐구는 하나님이 천연계와 상호 작용하기 위해 선택하시는 여러 과정의 측면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과학을 통해 위대한 창조주에 대한 깊은 감흥을 느낀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이해하는 데는 여전히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이것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경이로운 세계에서 깨어났던 아담과 하와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처럼 이 경이로운 세계를 탐구하고 놀라우신 창조주에 대한 감사함에 넘쳐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1 Ellen G. White, Spiritual Gifts (Battle Creek, Mich.: Seventh-day Adventist Pub. Assn., 1864), vol. 3, 93쪽
2 Ellen G. White, Education (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Pub. Assn., 1903), 134쪽
로니 날린 박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대총회 지구과학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로 캘리포니아 멘톤에서 아내 엘리사와 딸 조이아와 함께 살고 있다.
창조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성경 속에 당신의 창조 활동에 관한 권위 있는 설명을 계시하셨다. 엿새 동안 주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물을 만드셨으며 그 첫 주일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렇게 그분은 당신께서 창조 사업을 마친 것에 대한 영구적인 기념물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첫 남자와 여자는 창조의 극치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세상을 다스리고 그것들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이 다 창조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었으며 “심히 좋았”다(창 1:2; 출 20:8~11; 시 19:1~6; 33:6, 9; 104장; 히 11:3).
사이드 바2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기사에서 논의한 주제들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1. 세상의 기원에 대한 믿음의 역할과 과학적 탐구, 엘렌 화잇 <교육> 제14장, 국문 141~149쪽(영문 128~134).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http://www.egw.or.kr/EGW/Read.php?tn=EGW_BOOK_ED&Gt=cn&Gv=5&Gbn=-1
2. ‘엑스 니힐로(ex nihilo)’에 대해서는 폴 코펀(Paul Copan)과 윌리엄 L. 크레이그(William L. Craig)의 <무로부터의 창조 : 성경적, 철학적, 과학적 탐구(Creation Out of Nothing : A Biblical, Philosophical, and Scientific Exploration )>(Grand Rapids : Baker Academic, 2004)를 보십시오.
3. 임의성과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주제는 데이비드 A. 토머스(David A. Tomas)와 폴 F. 바르세나스(Paul F. Barcenas)의 ‘혼돈 : 창조의 도가니(Chaos: Crucible of Creation)’, College and University Dialogue 4, no. 3 (1992): 12~15를 참고하십시오. 이 글은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http://dialogue.adventist.org/numbers/04.3_English.pdf
4. 추가적인 자료 : 북아시아태평양지회 지구과학연구소
www.creationworld.kr
www.grisda.org
http://grisda.wordpress.com/
www.facebook.com/Geoscienceresearchinstit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