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 자에게
세상에 이름 없는 얼굴은 없다
제럴드A. 클링바일
그는 페루의 수도 리마 중심지에 있는 작은 교회의 마지막 줄 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춥고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안식일 아침, 내가 설교를 막 시작했을 때 그가 교회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그날은 일주일간 계속된 전도회의 마지막 안식일이었다.
모든 안수 목사는 대도시 리마에 있는 각 교회에 배정받아 교회에서 준비한 침례 후보자들을 도왔다. 내가 할당받은 교회는 리마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위치했다.
안식일 아침 일찍 아내와6개월 된 딸을 데리고 재림교회 대학의 캠퍼스를 나와 리마 시내로 향했다. 아침9시쯤 도착하자 장로님 한 분이 교회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쾌활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차 걱정은 하지 마세요. 예배 시간 동안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세계 곳곳의 번화가와 마찬가지로 리마 시내도 폭력, 범죄, 마약 중독자들로 악명이 높았다. 마약 중독자는 대부분 넝마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지저분한 얼굴로 거리를 전전한다. 그들이 목숨 걸고 찾는 것은 황홀경뿐이다. 그중에는 돈이 없어 마약을 구입하지 못하고 본드를 흡입하는 이도 많았다. 이들에게는 미래가 거의 없어 보였다. 나는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이곳에 오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결정인지 의심스러웠다.
그 작은 교회는 온 마음을 다해 예배를 드렸다. 오르간이나 피아노는 없었지만 찬미는 천국에까지 울려 퍼졌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침례 후보자를 여러 명 만났다. 그리고 장로들과 함께 그들의 결정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의미, 재림교회의 신자가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고 설교가 끝날 무렵 나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된 이들을 초청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활짝 웃었다.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침례탕에 들어가기 직전, 작년 한 해 동안 이 교회에서 학생 목사로 봉사했던 나의 학생 중 한 명이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목사님, 침례 후보자가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나는 잠시 멈춰 장로들에게 그 사람을 아는지 물었다.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일단 다른 후보자들의 침례식을 진행했다. 나는 학생에게 “침례식 후에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 사람에게 전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루이스는 교회 한쪽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떠난 상태였다. 루이스는 리마 도심의 마약 중독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오늘 아침 뜻하지 않게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마음속에 임하셨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에 대해 말해 주자, 그의 눈에서 작은 불빛이 켜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희미했지만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다.
뜨거운 눈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흥분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거기 태웠다(눅 19:35 참조). 사람들은 자기들의 옷을 길바닥에 늘어놓았다. 거리의 분위기는 호산나와 기쁨, 축복의 외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찬양의 노래들이 구주를 따라다녔다. 왕을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다 나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성전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눈물이 예수님의 얼굴을 적셨다. 당신의 몸이 요동치고 입술이 떨리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2).
성경은 예수께서 두 번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번은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일어서시면서 우셨다(요11:35 참조). 그리고 지금 예수께서는 수천 명이 살고 수만 명의 외부인이 방문하는 예루살렘 도시를 바라보며 다시 우신다. 예수님의 눈물은 예루살렘의 잔인한 미래를 말해 준다. 예수님의 눈물은 예루살렘 지도자와 시민들의 아집과 자만 그리고 거절에 대한 연민이다. 예수님의 눈물은 구원을 볼 수 없는 버림받은 자와 완고한 자 그리고 낙담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도시를 위해 울라
2008년 이후로 세계 인구의 50 퍼센트 이상이 도심에 살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그 수치가 75퍼센트에 달한다.1 복잡한 도시에 다닥다닥 붙어 살면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수많은 사람은 종종 외롭고 사람과의 대화로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 없이 그리고 이 세상의 구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살아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도시와 주민들을 위해 여전히 울고 계신다.
복음은 우리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한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사람들, 도시, 심지어 세상이 바뀐 이야기를 잇달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위대하신 주인을 위해 세상에 기별을 전하고 세상을 바꾸려는 한 줌의 무리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 갈릴리 고을을 비롯하여 전 세계로 나아가 소외된 자, 천한 자, 가난한 자, 부자, 마약 중독자, 외로운 자들에게 예수님의 눈물은 그들을 위한 것이며 그분의 긍휼과 다함 없는 은혜는 늘 유효하다고 전한다.
그들과 이후 주자들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우리 또한 이웃한 도시와 근교의 백성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상기하게 된다.
하나님이 임하시도록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교내에 있는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나는 경이와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다. 리마 한가운데서 환각제에 절어 지내던 젊은 루이스에게 그날 아침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그는 그분을 받아들였다. 기뻐할 일이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나의 학생과 함께 집중적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세심한 가르침을 받은 후에 재림교회에 입교하여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의미 있는 삶과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대해 들어 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으로 인해 나는 마음이 무겁다. 그들의 얼굴은 내 가슴에 각인되어 늘 예수님의 눈물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울었던 사건은 원초적 감정이나 예언적 통찰에 관한 사항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주위 사람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시해 준다. 첫째 자신이 먼저 전도되지 않고서는 남을 전도할 수 없다. 둘째, 도시 전도회(비단 도시뿐 아니라)는 기금이나 계획, 멋진 진행뿐 아니라 마음으로 일하는 것도 중요하다. 개인적인 동참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때묻지 않은 성도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죄인의 입장에서 이웃, 친구, 또는 만난 적 없는 수많은 사람에게 다가간다. 본드를 흡입하거나 거리에서 살아 본 적이 없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위해 계속해서 우신다.
제럴드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지의 부편집인이며 아내 샨탈, 세 딸과 함께 미국 매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에 살고 있다.
발문 :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울었던 사건은 원초적 감정이나 예언적 통찰에 관한 사항으로 그치지 않는다.
1 이 수치는 http://www.prb.org/Educators/TeachersGuides/HumanPopulation/Urbanization.aspx에서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