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풍성한 돌보심
남미 재림교회의 태동
실비아 숄투스 로셰르
남미에서의 재림교회의 태동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다 경배하라. 주님의 풍성한 돌보심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라는 찬미의 가사가 떠오른다.1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하심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이 다음 세대들을 위해 기록되어야 함에도 거의 그렇게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남미에서 이 복스러운 소망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결심한 이 대륙의 각 개인의 기여만큼이나 풍부하고 다양하였다.2 주님께서는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전도 책자, 우연한 만남, 꿈, 기적적인 치유, 신앙 간증 등 가장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이어지는 세 이야기는 남미에서의 재림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에 기여한 일련의 상황들 가운데 단지 몇 개의 고리일 뿐이다.
재림교회 태동 이전
유럽의 다양한 종족이 19세기 중엽에 남미로 이주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이주자들이 유럽의 친척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고국에서 전파되고 있는 재림교회에 대한 책자와 소식들을 전달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남미 대륙에 재림교회의 첫 선교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재림 소망의 기별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시며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수년 후 첫 선교사들이 도착하였을 때, 이 첫 관심자들이 통역자로 나섰으며,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을 도왔다.
특별한 간섭
1880년대 혹은 1890년대 어느 때, 브라질 산타 카타리나에 사는 칼로스 드레프케가 미국으로부터 독일어로 된 잡지들이 들어 있는 우편물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떤 책자도 신청한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 그 우편물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웃인 데이비드 호르트가 그것을 열어 보도록 용기를 주었고, 곧 이 잡지들이 지역의 이주민들에게 나누어져 읽히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재림교회의 책자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몇 달 전에 한 독일 선박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했던 칼로스의 의붓아들의 결심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남부 브라질의 독일인 이민자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미국의 재림교회 선교사들이 이 의붓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고, 그의 의붓아버지의 이름과 주소를 얻게 되어 칼로스 드레프케에게 잡지가 담긴 우편물을 보낸 것이었다. 이 책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어 이민자 몇 명이 이 잡지를 구독하게 되었다.
가스빠르 알토에 사는 길레르모 벨츠는 우라이아 스미스의 책 <다니엘서에 대한 생각들>을 받았다. 성경을 공부한 후에 몇 가정이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림교회 선교사가 남미 대륙에 발을 딛기도 전에 이 복스러운 소망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수천 마일 밖의 침례식
아르헨티나의 산타페에 있는 펠리시아 타운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침례교 이주자 몇 명은 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하기 훨씬 이전에, 또 하나의 이상한 연속적 상황의 결과로 1885년부터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들은 스위스로부터 받은 신문을 통해 뇌샤텔 호수에서 거행된 재림교회 침례식에 관하여 읽게 되었다. 그 기사는 <시조>라는 잡지도 언급하였고, 얼마 후에 율리오 두퍼투이와 그의 아내 아이다는 그들의 침례교 목사에게 그 잡지를 정기 구독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처음에 그들의 목사는 이 요청을 싫어했지만, 그들은 목사가 동의할 때까지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잡지를 받고 성경을 공부한 후에 두퍼투이 가족은 재림교회 신조들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새로 발견한 신앙을 그들의 이웃들과 나누었다. 이제 한 세기가 넘도록 두퍼투이, 아른, 마티우, 도반톤 그리고 피두 가족은 아르헨티나와 다른 지역에서 재림 소망의 기별을 전하고 있다.
섭리의 해결책
남미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 한 가지 난관은 현지 언어인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로 된 재림 기별 책자의 부족이었다. 문서 전도자들은 보통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로 된 책들을 이주민들에게 판매하였다. 그러나 한 번 더 하나님의 섭리가 이 복된 기별을 전파하는 일을 촉진시켰다.
두 명의 외국인 문서 전도자, 프레더릭 비숍과 토마스 데이비스가 1896년에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구사하지 못했기에 그들의 임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들이 언어 학습 목적으로 스페인어로 성경을 큰 소리로 읽으면서 산티아고의 한 대로변을 걷고 있을 때, 빅터 토만이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빅터는 전에 시편 103편을 읽고 있는 두 남자에 대한 꿈을 꾸었기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빅터는 영어라고는 한 단어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은 성경에서 구절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의사소통을 하였다. 그 결과로 빅터와 그의 형제 에두아르도(그들은 이미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가 결국 침례를 받게 되었다. 두 형제는 이 문서 전도자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서 전도자들이 머문 집의 여주인인 프루덴스 누녜스 발라다는 개신교 목사의 아내였는데, 칠레에서 최초의 재림교회 개심자가 되었다.
침례를 받은 후 빅터와 에두아르도 토만은 칠레뿐 아니라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스페인어로 재림교회 책자를 인쇄하고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에두아르도는 남미 대륙의 첫 번째 재림교회 인쇄소를 책임지게 되었고, 나중에 이 인쇄소는 지금의 남미 스페인어 출판소를 시작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야기가 계속되다
재림교회 문서 전도는 오늘날 재림 기별을 전하는 데 유일하게 주요한 방법은 아니다. 현재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넷 등이 충성스런 신자들의 개인적인 기여를 보충하고 있다. 하나님은 장벽을 모르시며, 그분의 사업에는 한계가 없다.
앞의 세 가지 이야기는 남미 대륙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의 몇 가지 사례일 뿐이다. 주님의 넘치는 돌보심이 지난 세월 동안 이 지역에서 재림교회의 급격한 성장을 일으킨 하나님의 섭리의 수많은 사례 가운데 잘 드러난다.3
남미에서 활동한 재림교회 개척자들에 관한 어떤 이야기들은 이미 기록되었고, 더 많은 이야기가 기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늘만이 아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요 1:50)고 그리스도께서 한 제자에게 하신 약속이 남미에서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오늘날 가능한 모든 인적, 기술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돌보심은 여전히 존재한다. 구원의 기별을 전하는 일에 하나님의 성령과 나란히 함께 일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 남미에서 주님의 섭리의 기적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기를!
실비아 숄투스 로셰르
아르헨티나에 소재한 리버 플레이트 재림교회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본 대학 출판소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남미의 재림교회사에 관해 많은 기사와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 영어판 재림교회 찬미가 83장. 한국어판에는 없음.
2 남미지회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에콰도르,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로 이루어져 있다.
3 남미지회는 1916년 88개 교회, 교인 4,903명으로 조직되었다. 오늘날은 교회 11,535곳, 교인 수는 2백만 명이 훨씬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