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꿈에 종지부를 찍는 꿈
지구 역사상 가장 큰 사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조셉 올스타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장면에 내 눈을 의심하였다. 저 멀리 예수님과 천사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즉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구원받을 것인지 멸망할 것인지 생각이 복잡했다. 순간, 구원받을 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쁨으로 맞이하지만 멸망당할 자들은 두려워하리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이 순간이 행복한가? 아니면 두려운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나는 그분이 오실 때 우리가 보일 반응이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하여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는 것과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이 현재 우리 삶의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사건 다른 반응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멸망당할 자들은 산과 바위에게 애원하여 이르기를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6)고 할 것이다. 예수님과 요한은 많은 이가 울며 애통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구원받을 자들은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사 25:9)다.
같은 사건에 대하여 얼마나 대조적인 반응인가?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하나님이 오실 때 세상 인구가 양분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한 부류에 대하여 “좋다. 너희는 구원받은 자라서 그런지 행복해 보이는구나. 팔을 들라. 내가 너희를 하늘로 데려가겠다.”라고 이야기하시거나 다른 부류에 대해서 “너희는 실패하였다. 그러니 도망하든지 바위에 애원하거라.”라고 말씀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임재 자체가 두 가지 다른 반응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각본은 없다. 다시 말해 공중에 임하신 예수님을 따를지 거절할지는 각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살전 4:17 참고).
이런 시각에서 재림을 바라본다면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은 우리가 죄인의 기도를 드렸든 말든, 우리의 과거 행실, 교적, 선행, 악행, 기념책, 심지어 어린양의 생명책을 참고하셔야 할 이유가 없다. 그분이 하실 일은 단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누가 그분께 달려오는지 아니면 그분에게서 달아나는지 보시기만 하면 된다.
아는 방법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이다.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볼 때 우리의 반응은 무엇을 근거로 결정될 것인가? 놀랍게도 그 대답은 명백하다. 우리는 작게나마 이미 가정에서 수없이 그것을 경험했다.
과거 내 자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내가 집 문을 열고 들어와 신을 벗으려 할 때 찬바람이 불고 아이들이 인사도 없이 눈만 마주치고 고개를 돌렸던 적이 간혹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가 넘어질 정도로 안기고 반기며 웃고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을 나누었다. 같은 상황에 두 가지 다른 반응이다. 차이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나와 내 자녀 사이의 관계의 상태가 달랐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있었든지(순종의 문제), 반항의 분위기(회개와 회심), 불순종과 수치(죄와 용서), 오해와 상처(계시와 갱신)가 있었다. 더 많은 상황을 말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신앙생활을 묘사하는 전문적이고 신학적인 용어들은 일상적인 생활과 관계를 암호화한 언어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미래에 그리스도께 달려갈지 그로부터 달아날지는 오늘 내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그런 관계는 전통적인 신학의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싹트고 자라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그분의 재림을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면 경험적인 관계가 지식보다 훨씬 중요하다(약 2:19, 20 참고). 자동차의 작동 원리를 이해한다고 반드시 훌륭한 운전자가 되는 게 아니고 운전을 잘해야 훌륭한 운전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행복 아니면 고문
회심하지 않은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거나 하늘을 즐길 수 없다고 진술한 엘렌 화잇의 예리한 통찰을 읽어 봤을 것이다. 이런 개념은 재림의 현장에 나타나는 큰 차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엘렌 화잇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들에게 하늘은 기쁨이라기보다는 “고통의 장소”가 될 것이며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멸망을 환영할 것이라고 했다.1
C. S. 루이스는 그의 비유적인 책에서 이런 개념을 확대하여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백성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 책에서 많은 사람이 하늘을 집으로 삼기보다 지옥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다시 뛰어오른다.2 그들은 결코 하나님 중심의 나라를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진실성과 기독교 신학의 대주제들 사이에는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 이 둘은 뗄 수 없다. 관계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그분을 반길지 거부할지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이 자주 간과된다. 만약 내 신앙이 진실하다면, 나는 그분이 오실 때 그분과 함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분이 없는 곳에 있기를 바랄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이것이 자유이며 사랑이다. 너무 늦지 않도록 지금 알게 된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고후 13:5 참고).
결국 내 꿈은 악몽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께서 오실 때 나는 기뻐했다. 그리고 모든 꿈에 종지부를 찍는 꿈이 실현될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1 <정로의 계단>, 17, 18
2 C. S. Lewis, The Great Divorce (New York: Macmillan, 1946)
조셉 올스타드
AIIAS와 앤드루스 대학을 졸업했다. 아내와 세 딸과 함께 미국 북부 몬태나에 거주하고 있다.
발문
내가 미래에 그리스도께 달려갈지 그로부터 달아날지는 오늘 내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이드바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교회의 복스러운 소망이며 위대한 복음의 결정이다. 구주의 오심은 실제적이며, 직접적이요, 가시적(可視的)이며, 세계적이다. 그분이 오실 때, 죽었던 의인들은 부활하여 살아 있는 의인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은 죽을 것이다. 세상의 현실적 상태와 함께 거의 모든 예언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려 준다. 재림의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권면을 받고 있다(딛 2:13; 히 9:28; 요 14:1~3; 행 1:9~11; 마 24:14; 계 1:7; 마 24:43, 44; 살전 4:13~18; 고전 15:51~54; 살후 1:7~10; 2:8; 계 14:14~20; 19:11~21; 마 24; 막 13; 눅 21; 딤후 3:1~5; 살전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