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할 데 없이 큰 힘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누리자
멜락 알레마예후
당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힘든 상황 때문에 근심한 적이 있는가? 혹은 무거운 죄책감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은 없는가? 당신의 하늘에 희망의 햇살을 가로막는 낙담의 구름이 끼진 않았는가? 그것이 근심이든 두려움 혹은 낙담이든 간에 당신을 위한 비할 데 없이 큰 능력이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이 지극히 크신 능력을 설명하고 있다고 사도 바울은 기록한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18~20).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참으로 알고자 했다(빌 3:10 참조). 예수의 빈 무덤은 지극히 크신 능력이 어떻게 서로 다른 개인들의 삶으로부터 근심과 두려움 그리고 낙담을 물리쳤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근심하는 여인들
이른 일요일 아침이었다. 금요일 이후로 슬픔에 잠겨 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신에 기름 붓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걱정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막 16:3). 마가는 4절에서 “그 돌이 심히 크더라”고 기록하면서 돌의 크기에 대해 우리에게 자세한 정보를 주고 있다. 여인들은 걱정이었다. 어떻게 그들 스스로 그 큰 돌을 굴릴 수 있을까? 그들은 도움이 필요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걱정이 부활의 위대한 능력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마가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러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4절). 여인들은 다 끝난 문제로 고민했다. 돌은 이미 굴려졌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걱정 대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물 중 많은 것을 이미 제거하셨다.
여인들이 접근하는 문제로 걱정했음을 눈여겨보라.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접근해야만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들은 이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를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이다. 왜냐하면 그 장벽은 이미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 지극히 크신 능력 때문에 예수께서는 부활하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고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다가갈 수 있도록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다(히 10:20).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우리를 하나님께 연결시킬 수 있는 중재자는 필요치 않다. 고개를 들어 장애물이 이미 제거된 것을 보고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누리자.
공포에 사로잡힌 베드로
마가복음 16장에 의하면 그 여인들은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대신 한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 주었다. 또 여인들에게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임을 전하라고 명했다. 그 천사는 특별히 제자 중 한 명의 이름을 언급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막 16:7). 베드로 역시 제자 중 하나였는데 왜 굳이 따로 이름을 거론했을까?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의 배경을 간단히 확인해 보자.
베드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인을 버리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큰소리쳤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병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왔을 때도 자신의 칼을 빼 들고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녀 하나가 공개 석상에서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지목했을 때 거침없던 베드로는 참담하게 무너졌다. 그의 부정은 깊은 슬픔을 낳았다. 수탉이 울었을 때 그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서 울었다”(막 14:72, 표준새번역).
죄책감에 시달리고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다는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공포에 사로잡힌 베드로는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지은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나는 되돌아갈 수 있을까?” 베드로의 경험은 죄 지은 우리의 고민을 잘 설명해 준다. 우리는 특정한 죄를 짓는다. 설상가상으로 그것은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을까?” 비할 데 없는 부활의 능력은 베드로에게 커다란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엘렌 화잇은 그 경험에 대해 설명한다. “천사들은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주를 부인한 수치스러운 일과, 구주의 사랑과 고민에 싸인 시선이 항상 그의 앞에 어른거렸다. 어떤 제자들보다도 베드로는 가장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의 회개가 용납되고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보증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특별히 그의 이름을 들어 가며 말했다”1.
이 부활의 능력은 예수께서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실 수 있도록 해 주었다(히 7:25 참조). 요한은 우리에게 권고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실의에 빠진 제자들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견줄 데 없는 능력을 경험한 이들 중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있었다. 누가복음을 보면 두 제자는 여행길에서 만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제자들은 외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이 제자들은 예수께서 로마의 집권 세력을 몰아내시고 주권 국가로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세우실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구원의 희망으로 기대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경악했고 크게 낙담했다. 하지만 부활하신 구주는 대화를 계속해 나가면서 비할 데 없이 큰 능력을 드러내셨다. 머지않아 그 능력은 그 제자들의 슬픔을 쫓아냈고 그들의 마음은 희망과 기쁨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눅 24:32 참조).
실망은 ‘놓친 약속’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분명 실의에 빠지고 우리의 기대가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은 모든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 얼마나 암울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 그 미래를 밝게 만드신다.
지극히 크신 능력에 다가가기 위한 조건
에베소서 1장 18, 19절에 기록된 바울의 말을 기억하는가?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 유효하다. 이것은 우리가 이 능력에 접근하기 위해 가져야 할 유일한 조건이다. 우리가 부활하신 구주를 만나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때 근심과 두려움, 낙담은 모두 녹아 없어질 것이다. 비할 데 없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자!
1 <시대의소망>, 793
멜락 알레마예후
현재 필리핀 실랑에 있는 AIIAS에서 구약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멜락과 그의 아내 미레 그리고 두 자녀 페벤과 파울로스는 에티오피아 출신이다.
발문
고개를 들어 장애물이 이미 제거된 것을 보고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