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난관에도 넉넉한 은혜
남아시아태평양지회
페르디난드 O. 레갈란도
남아시아태평양지회(이하 남아태지회)는 방글라데시에서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18개국의 다양한 문화를 포괄하며1 1백만 명 이상의 재림 신자가 있다.2 남아태지회의 특성은 종교적으로 이슬람, 힌두교, 불교, 정령 신앙이 지배적이며, 필리핀에서만 기독교가 다수 종교이다. 수많은 방언이 있기 때문에 이 지회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언어는 10가지에 이른다.3 필리핀에서만 170여 개 방언이 쓰이고 있어 각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란 엄청난 도전이다.4 이런 특징에도 어떤 지역에서는 신자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아래 이야기는 우리의 복음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예증한다.
잃은 양 찾기
필리핀에서 목회할 때 나는 교회의 모든 신자, 특히 비활동적인 신자들을 꾸준히 방문했다. 신자들의 말을 경청했고 성경을 읽어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리고 때론 방문 중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는 목사가 자신들의 집을 방문하고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그들에게 영예로운 일이었다.
어떤 이는 “목사님이 저의 집을 방문하고 기도해 주셔서 다시 교회를 출석하고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아태지회 내의 성실한 목회자들은 좋은 성과를 낳고 있다.
재림교회 교육으로 영혼을 구하다
약 12년 전 맨 앞자리에 앉아 나의 성경 강의를 유심히 듣던 여학생이 있었다. 기말고사를 치르기 전까지 그가 동료 학생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사실 외에 나는 그에 대하여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기말고사 때 나는 학생들에게 강의에서 배운 내용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주제와 그 이유에 대하여 쓰도록 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가장 흥미로운 주제였다고 썼다. 그런 다음 오랫동안 상처 받은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솔직히 저는 두 아이를 가진 미혼모입니다. 교수 요목을 받은 첫날, 저는 이 주제를 보고 상담이 필요해 교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갔다. “1994년 그 사람이 제 삶에 끼어든 뒤 저는 죄책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기혼남과 동거하고 아이까지 낳은 제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속죄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여러 차례 ‘9일 기도’를 바쳤다.5 “제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저는 그것이 제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인지 하나님께 묻곤 했습니다. 교수님이 이 주제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기 전까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설명과 성경의 도움으로 저의 짐은 어느 정도 가벼워졌습니다. 이 강의를 통해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학생은 이런 글을 남겼다. “제가 이 대학에 등록했을 때, 사람들은 ‘그곳에 등록했어요? 엄청 지루할 텐데요. 거기는 항상 성경을 들먹이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이 강의를 통해 저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밝히 깨달았습니다.”
“저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십니다.”라는 그의 말은 재림교회의 교육이 주는 감화의 증거이다. 나는 강의실 안팎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성경을 가르치지만 성인은 아닙니다. 단지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나는 매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복음을 나누며 살기 위해 노력한다.
찰리
그날 저녁 찰리가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다. 주말 영성 수양회 헌신 예배 시간에 내가 설교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나는 그를 집 안으로 맞이했다. 그는 등에 배낭을 짊어지고 헝클어진 머리에 눈두덩은 거무스름하고 핼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설교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교자를 찾는 데 꽤나 고생했던 모양이다.
색이 바랜 면 반바지를 입은 찰리의 다리와 무릎에는 시멘트 가루가 허옇게 묻어 있었다. “목사님, 일터에서 바로 오느라 이렇게 입고 와서 죄송합니다.” 그는 나의 약속을 받아 내는 것 외에 다른 관심사가 있었다. 그는 나와 대화하기를 원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의 삶이 공개되었다.
찰리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일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장로였지만 마을의 한 말썽꾼을 총으로 쏴 죽인 죄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형제 가운데 맏이었던 찰리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세 자녀를 부양하려고 아기 옷을 지어 한 달에 200페소(약 오천 원)를 버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찰리는 열심히 일했다. 그나마 찰리의 수입이 한 달에 500페소(약 만이천 원)였으니 아이가 번 돈치고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요리에 사용하는 숯을 만드는 일 때문에 그는 폐병에 걸렸다. 건강을 회복하려면 일을 중단해야 했다. 건강을 되찾은 그는 다시 열심히 일하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비싼 학비 때문에 대학에 다니기는 버거웠다. 그래서 그는 1996년 근로 학생으로 필리핀 재림교회 대학(AUP)에 입학했다. 하지만 폐병이 다시 도져 4년 동안 학업을 중단했다. 건강을 되찾고 복학한 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기 원했다. 그러려면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시간당 15페소(약 사백 원)를 벌면서 몇 년을 더 공부해야 했다. 그는 작은 창이 있는 직사각형 상자 모양의 좁은 방에 기거했다. 어떻게 보면 감옥 같은 곳이지만 임대료는 무료였다.
아내는 찰리를 위해 식사를 제공했고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아마도 다가올 수양회 준비 때문인 것 같았다. 찰리는 상자처럼 작은 방에 기거하며 배를 곯을지언정 신앙 동아리 회장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필리핀은 다수의 신학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러나 목회자로 채용할 여지는 거의 없다. 찰리는 목사가 되려는 꿈을 접고 필리핀어를 부전공하여 2006년 대학을 졸업하였다. 하나님은 신실한 찰리에게 복을 주셔서 좋은 아내와 두 자녀를 얻게 하셨다. 대학에서 만난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지만 그는 아직도 괜찮은 직장을 찾고 있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그는 활동적으로 지역 교회를 돌보며 신실한 재림 신자로 살아간다.
남아태지회 내에는 삶의 난관과 씨름하며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전진하는 찰리와 같은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그러한 난관 속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남아태지회에서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약속을 주장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어떤 난관에도 그분의 은혜는 넉넉하다.
1 www.ssd.org/territories/countries.html.
2 www.adventiststatistics.org/view_Summary.asp?FieldID=D_SSD&Year=2013&submit=Change#main.
3 www.ssd.org/territories/countries.html.
4 www.ethnicgroupsphilippines.com/people/languages-in-the-philippines/.
5 가톨릭에서 천사나 성인 또는 삼위 하나님께 바치는 9일간의 기도 의식
페르디난드 O. 레갈란도
미국 워싱턴 주 왈라왈라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필리핀 출신 교수이다. 필리핀 재림교회대학과 멕시코의 몬테모렐로스 대학에서도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