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화잇과 도시 선교
아이번 리 워든과 J. L. 톰슨
엘렌 화잇의 저술들은 도시 선교에 대한 놀라운 긴급성과 선교 열정을 보여 준다.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도시들에서 중요한 시기를 보낸 후(1874~1901년), 그녀는 뉴욕과 다른 대도시들의 필요에 더욱 깊은 관심을 보였다.1 사실, 그녀는 “도시에서 교회가 소홀히 했던 복음 사업에 부담감을 가졌다. 소홀히 대했던 부분을 교정하는 일이 1901년과 1910년 사이에 그녀가 하고자 했던 사업의 핵심이었다.”2 그녀는 그 문제를 아주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대총회장 A. G. 다니엘스가 공격적인 도시 선교 전략의 윤 곽을 그려 올 때까지 한동안 그와의 만남을 거절했다.3 1908년, 엘렌 화잇은 이같이 적었다. “유럽, 호주, 미국 그리고 지경 저편의 지역에 손을 대지 못한 많은 도시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자금이 현재 묶여 있는 상태이다.”4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 것
엘렌 화잇은 시골 생활과 ‘벽지(僻地, outpost)’5 기반 전도 모델을 강조하는 권면을 종종 진술하였다. 이 모델에서 선교사들은 시골에서 살면서 도시로 선교하러 온다. 그러나 조지 나이트는, 다른 진술들 역시 “똑같이 타당하고 중요한데도 소홀히 취급당했다.”면서 “따라서 재림교인들은 통상 엘렌 화잇의 관점 중 절반만을 강조한 셈”이라고 지적했다.6
화잇은 ‘중심지(in-post)’ 기반 전도 모델을 지지하는 글도 기록했다. “가까운 우리 주위에는 영혼 구원 활동이 행하여지지 않는 도시와 마을들이 있다. 현대 진리를 알고 있는 가정들이 그리스도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이러한 도회지와 촌락에 살아야 한다.”7
두 권면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기관과 주거 장소의 위치를 각각 구별하여 더욱 상세히 설명할 뿐이다.
기관이 있다는 이유로 도시에 정착하는 가정이 쓸데없이 많은 것을 보고 엘렌 화잇은 이를 피하고자 했다. 지역 교회를 향해 ‘벽지’ 모델을 강조한 게 아니다.8 더욱이 시골 이주에 대해 그녀의 권면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개인적 지시를 표현한 것이다.
균형 잡힌 진술들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하라는 그녀의 초기 진술 중 하나인 1885년의 진술은 이것을 효과적으로 예증한다.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가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망하라는 신호가 되었던 것처럼, 법왕권의 안식일을 강요하는 법령을 통한 우리나라에서의 권력 장악은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가 될 것이다. 그때는 대도시들을 떠나고, 산간(山間) 한적한 곳에서 궁벽한 거처들을 마련하기 위하여 더 작은 도시들을 떠나갈 준비를 할 때이다.”9
교회 기관에 대해서도 이같이 실제적이고 점진적인 입장에서 권면한다. “그들이 떠나는 것이 가능할 때까지” 혹은 “그렇게 하기 위한 길이 그들 앞에 열릴 때까지”10 등 조건적인 문구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인용 문구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엘렌 화잇은 현실적이다. 독단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시골 이주를 결정할 때는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받은 지시를 중요하게 본다.
엘렌 화잇은 균형 잡힌 태도를 기르라고 신자들에게 요청했다. “택하심을 입은 헌신하고 재능 있는 교역자들이 인구가 많은 중요한 중심지에 주재하여 공적인 봉사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하신 바인 동시에, 이런 도시에 살고 있는 교인들이 영혼 구원 사업에 그들의 천부적 재능을 사용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이다.”11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특별히 도시에 사는 교인들은 이 시대에 세상에 임할 기별을 듣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일하는 데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신 달란트를 겸손하게 활용해야 한다. …그러한 일꾼들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착수할 때, 그들은 다른 어떤 길로도 결코 접근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이 슬기로운 개인적 노력에 반응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12
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일과 그곳에 교회 기관을 세우는 일이 가능한 경우에는 그것을 옹호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들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고 도시에서 벗어나지 않는”13 가정들에 대해 그녀의 입장은 매우 단호했다. 명확하게 이주 결정을 내리지 않고 서성대는 어떤 가족을 훈계하는 글도 있다.14
시골 이주는 점진적이어야 한다고 그녀가 권면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주하라고 지시한 것까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또 한편으로, 그녀는 하나님의 지도와 증거를 기다리는 동시에 ‘중심지’ 모델 기반의 도시 선교도 수행하라고 격려한다.
“남아 있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의 범위가 제한적일지라도 선교 활동에 아주 적극적이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지혜롭고 분별력을 갖도록 축복하실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과 시간 안에서 그분은 그들이 현대 도시 생활의 오염시키는 영향에서 계속해서 둘러싸이지 않을 곳에 그들을 두는 일이 가능하게 하실 것이다.”15
모순은 없다
엘렌 화잇의 권면을 보면 시골 생활과 도시 선교에 대한 그녀의 지시에는 모순이 없다. 그 문제에 대한 그녀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이주 ‘시기’에 대해 하나님은 신자에게 개인적으로 지시하신다. (2) 또 그분은 선교를 위해 몇몇 신자들을 도시로 이주하라고 부르신다. (3) ‘중심지’ 모델과 ‘벽지’ 모델이라는 두 가지 선교의 결과 도시 내에 새 신자가 생길 것이다. (4) 도시의 새 신자가 ‘벽지’ 모델과 ‘중심지’ 모델 중 무엇을 택할지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북아메리카와 유럽, 호주에서 화잇 자신이 경험한 일 그리고 당시 도시 사역자들16에게 그녀가 보낸 메시지들에는 도시 선교를 향한 그녀의 열정이 배어 있다. “대도시들을 경고하는 일은 안수 목사들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께서는 경고받지 않은 도시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목사뿐 아니라 의사, 간호사, 문서 전도자, 성경 교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그분의 은혜의 능력을 알고 있는 다양한 재능의 헌신적인 평신도들을 부르고 계신다. 시간은 신속히 지나가고 있으며 해야 할 일은 많다. 현재의 기회들을 현명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모든 기관이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17
1 엘렌 G. 화잇은 “대도시 뉴욕에서 사업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가급적 가장 우수한 사역자들의 조력을 받아야 한다.”(복음전도, 384)라고 말했다.
2 George Knight, “Another Look at City Mission,” Adventist Review, Dec. 6, 2001.
3 Arthur White, Ellen G. White: The Later Elmshaven Years, 1905~1915(Washington D. 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2), 223~228
4 <복음전도>, 428
5 <복음전도>, 76; <가려 뽑은 기별> 2권, 358
6 Knight, “Another Look.”
7 <그리스도인 선교봉사>, 180
8 Knight, “Another Look.”
9 <교회증언> 5권, 464, 465
10 Ellen G. White, “Behold, What Manner of Love!” Review and Herald, Sept. 27, 1906.
11 <사도행적>, 158
12 <의료봉사>, 332
13 Ellen G. White, Country Living(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46), 6
14 Ibid
15 Ellen G. White, “Behold, What Manner of Love!”
16 스티븐 N. 해스켈은 1901년 뉴욕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도시 선교에 대해 개인적으로 엘렌 화잇에게 특별한 권면을 받았다. 다음을 참조할 것. Hetty Haskell to E. G. White, July 29, 1901; and S. N. Haskell to E. G. White, July 18, 1901; July 29, 1901.
17 <사도행적>, 158, 159
아이번 리 워든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위원회 부소장이다.
J. L. 톰슨
캘리포니아 발레이오 소재 발레이오 재림교회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