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만남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자
프라우케 규로카
그리스도인과 재림교인의 행동이나 생활 방식에 대해 글쓰기란 쉽지 않다. 서구 사회에서는 사생활과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므로 아무도 개인의 생활 방식에 대해 가타부타 할 권한이 없다고 본다.
지뢰
생활 방식을 놓고 토론할 때마다 옷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교인들은 마음이 불편해진다. (종종 침례 받지 않은) 젊은 여자들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치마가 짧다거나 신발 굽이 너무 높다고 말하는 나이든 여자 분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듣고 예의상 조용히 무시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심할 경우에는 교회에 정나미가 떨어져 발길을 끊기도 한다.
정반대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예배 시간이나 평일의 옷차림이 어떤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음식물은 재림교인 사이에 갈등을 야기하는 또 다른 화두이다. 때때로 교회를 양극단으로 몰아간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 아래 다른 부류의 생활 방식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종종 신앙의 진정한 초점을 놓치고 교회 분위기는 흐려지며 선교는 위축되거나 마비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성경이 말하는 생활 방식의 원칙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생활 방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재림교인임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어야 할까?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따분한 생활, 다시 말해 재미있는 것은 모두 금지하는 생활과 동의어인가?
로마서에서 바울의 권면을 읽으면서 나는 큰 도움을 얻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 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변 세상과 다른 표준을 따라가면서 특별하게 살기 원하신다. 그 표준은 성경이다. 예수 자신이 우리의 모범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모두 사상의 변화를 뜻한다. 이런 변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 일을 행할 때 기뻐하게 된다.
이 생활 방식이 따분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는가?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럴지 모른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라고 공언하는 자에게 이것은 흥미로운 도전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원칙에 따라 살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신학적인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킬 시간과 공간을 찾는 일이다. 삶이 미디어, 일, 오락 혹은 기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면, 환경이 제공하는 생활 방식과 리듬을 (심지어 무의적으로) 채택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우리는 이런 성향에 의도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보고 또 보고
신약 성경은 예수와 만나 변화된 사람들을 소개한다. 거라사 지역에서 귀신 들린 사람도 변화되었다!(막 5:1~20) 예수와 극적으로 만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옷차림과(15절)과 시간 활용까지도 변했다(20절).
예수와 교제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예를 보여 준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야망이 있었다. 당시 유대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이타심과 봉사의 정신이 넘치도록 변화되었고 모든 것(돈, 시간, 건강, 기술)을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개인적인 희생을 하고자 했으며 심지어 그런 기회에 대해 감사했다(행 5:41 참조).
여기 그 비법이 있다(우리의 비법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을 개발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읽고 최대한 개인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성령(예수님의 대리자)의 감화를 통해 인도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나야 한다. 침례 요한의 단순한 생활 방식(마 3:4 참조)을 통해 나는 단순한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공감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종종 식사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는 사실(막 3:20; 6:31 참조)과 그분께서 딱히 쉴 곳이 없었다는 사실(마 8:20을 보라)을 읽을 때면, 종종 먹고 마시며 소비 지향적인 삶을 사는 데 내가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더 나은 방식으로 시간과 돈을 사용하길 원하실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균형을 보여 주는 완벽한 모본이시다. 식사할 겨를이 없을지언정 그분께서 스트레스로 나가떨어졌다는 내용은 결코 없다. 그분은 중요한 일할 시간을 언제나 확보하셨다. 예수는 말과 행동에 휘둘리지 않고 사명에 집중했다(요 17:4 참조). 그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셨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거대한 목적 아래 예속되었다. 궁극적으로 예수는 자신조차도 잊었고 우리가 진실로 다시 살도록 생명을 주셨다.
말씀 가운데 이 예수를 만난 자들은 성령의 감화를 통해 안에서부터 변화된다. “그것은 자아가 더 이상 우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라고 엘렌 화잇은 기록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들을 취하여서 습관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효력을 가지게 하기 위해 그것들을 (신자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셨다. …예수가 기뻐하는 일이 곧 그가 기뻐하는 일이 된다. 즉 영혼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며 그도 기뻐한다.”*
우리의 건강, 우리의 외모, 우리의 소유, 우리의 여가 활동 –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더 고상한 목적에 부속된다. 이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도 지루한 것도 분명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할 기쁨과 성취를 제공한다.
프라우케 규로카
<애드벤티스트 월드> 독일어 번역자이며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 Ellen G. White, “Missionary Work,”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Oct. 6, 1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