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인도양지회의 재림 신도들이 굳건한 토대를 형성하다
마이클 소쿠파
남아프리카는 식민 통치와 선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난 몇 세기 동안에 빈번이 변경된 남아프리카 대륙의 국경선들만 일별해 보아도 그 같은 격정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 재림교회의 공식 출범 150주년을 맞아 아프리카 남부 지역 재림교회의 태동과 초기 선교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남부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사들
1887년 7월에 두 선교사 C. L. 보이드와 D. A. 로빈슨 가족이 남아프리카에 도착했다. 남아프리카로 떠난 그들은 1887년 6월 18일, 노르웨이의 모스에서 엘렌 화잇을 만났다. 엘렌 화잇은 그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권면을 글로 전했다. “머나먼 고장에 있는 수고의 일터를 향해 길을 떠난 친애하는 형제들에게.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개인적인 대담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바르게 말할 힘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 그녀는 <아프리카에 보내는 증언>에서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사업에 관련된 모든 일은 서로 떨어져서 혼자 일하지 말고 함께 일하십시오.”라고 충고하였다.2
엘렌 화잇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만나게 될 어떤 개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인종이나 사회 경제적 신분에 기초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말 것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십자가를 쳐들 용기나 또는 인기 없는 진리에 따라붙게 되는 비난을 감수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사업의 성격과 관련된 어떤 일을 식별할 수단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제일 먼저 상위 계층 사람들에게 접근하십시오. 그러나 낮은 계층의 사람들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3
또 그들이 선교사로서 사용해야 할 방법들과 접근 방식들에 대해서도 충고했다. 그가 제시한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나열되어 있다. “출판물, 신문, 소책자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진리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절대로 이러한 일에 돈을 너무 아끼지 말도록 하십시오. 이러한 일은 지혜롭게 시작하고 지혜롭게 추진하기만 한다면 성공적인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4 출판물의 역할은 재림교인 광부 윌리엄 헌트가 피터르 베셀스과 헤오르허 반 드루텐에게 재림교회 출판물들을 나누어 주었을 때 입증되었다.
엘렌 화잇은 또 선교사들에게 “진리와 의의 길에서…겸손과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라고 권면하였다.5
최초의 재림교회 모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킴벌리, 비콘스필드에서 C. L. 보이드가 조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렌 화잇이 계급, 재산, 혹은 인종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경고하기 전에, 자산가들과 상위 계층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안식일 진리에 이끌리게 되었다.
피터르 베셀스와 헤오르허 반 드루텐은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여 안식일을 발견했다. 베셀스 가족의 농장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자 피터르 베셀스의 아버지는 그의 재산으로 재림교회의 복음 사업 발전에 기여했다. 피터르 베셀스 부자는 A. T. 로빈손과 함께 케이프 식민지의 수상인 세실 로도스를 방문하여 부지를 요청했고 이후 이곳에 솔루시 미션을 세웠다.
사업이 퍼지기 시작하다
1894년에 선교사 가족들이 정치적으로 소란스러웠던 남부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에 자리를 잡았다. G. B. 트립 부부, H. M. 스패로우 부부 그리고 W. H. 앤더슨 부부는 선교 본부를 같이 세웠다. 그러나 인종 폭동 때문에 선교사들은 불라와요로 떠나고 세 가정은 다섯 달 동안 소달구지에서 지냈다.
1902년에 니아살란드에 있는 제칠일침례교회로부터 부지를 매입하여 플레인스필드 선교 본부를 세웠는데 이것은 후에 마마물로로 개명되었다. 조셉 부스와 토마스 H. 브랜드는 니아살란드에 온 첫 번째 선교사들이었다.
1905년에 W. H. 앤더슨이 잠비아에 루상구 미션을 세우기 위해 잠베지 강을 건넜다. 잠비아는 오늘날 남아프리카-인도양지회 안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연합회이다.
1919년에 앤더슨은 카녜에 병원을 시작한 의료 선교사 A. H. 크레츠머와 협동하여 바우추아날란드(지금의 보츠와나)에서 재림교회의 복음 사업을 시작했다.
1922년에 앤더슨은 지금은 나미비아로 알려진 남부 아프리카로 가서 미션 본부를 세울 수 있는지 탐색했다. 그는 오밤볼란드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접근이 거부되자 앙골라로 들어가는 여행 허가를 받기 위해 빈트후크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두 달을 여행한 후에 마침내 봉고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T. M. 프렌치와 J. D. 베이커의 도움으로 봉고 미션 본부의 부지를 선택했다.
초기 방식들
앤더슨은 그의 방식들을 문서로 남김으로써 남부 아프리카 복음 사업의 초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앤더슨은 그 지역의 전도자들이 전도회를 겨우 2주일로 끝내는 것을 보고 전도회 기간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였다. 짐바브웨의 로워 궬로에서 전도회 첫 두 주가 지났을 때 신앙을 결심한 사람은 두 명뿐이었으나 전도회의 세 번째 주간에는 15명이 더 결심했고 전도회의 넷째 주간에는 추가로 38명이 그리스도께 삶을 바쳤다.
그는 그 전도회 기간에 84명이 ‘청강생(hearers)’ 혹은 ‘견습생(probationers)’으로 분류되는 교과반에 가입했다고 보고했다. 이 교과반에서 회심자들은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교육받았고 이후 신실함이 입증되면 교회로 편입되었다.6
앤더슨은 이렇게 충고했다. “영혼을 얻기 위해 선교에 나서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교지 백성에 대해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없다면, 차라리 선교사로 나서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사랑은 모든 선교의 기초입니다.”7
1946년에 앤더슨은 동료 선교사 모두에게 방문 가정 지역을 배정했다고 보고했다. 각 전도자들은 맡겨진 지역의 가정을 날마다 방문해야 했다. 앤더슨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공중 전도회 장소에는 자주 출석하지 않아도 집으로 찾아온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8
정치적 문제에 선교사가 관여하는 것에 관해 앤더슨은 그런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어떤 제도를 판단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예수님을 모델로 삼았다. 당시 로마가 집권한 사회에 정치적 병폐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먼저 인간을 향상시키는 일에 늘 집중했다.9
견고한 기초
엘렌 화잇이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적은 없었지만, 현지 선교사에게 보낸 조언의 글들을 보면 그녀가 아프리카 복음 사업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W. H. 앤더슨의 광범위한 선교 사역은 초창기에 선교사들에게 모델이 되었다. 앤더슨은 선교 통계뿐 아니라 그가 사용한 선교 방식들을 기록하는 일에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남아프리카-인도양지회의 재림 신자가 300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 지역의 교회는 초기에 미약한 방법으로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그의 사업을 돌보셨다.
1 Ellen G. White, Testimonies to Africa(Cape Town, South Africa: South African Union conference of Weventh-day Adventists, 1977), 7
2 Ibid., 8
3 Ibid., 10
4 Ibid., 13, 14
5 Ibid., 14
6 W. H. Anderson, ‘Frntier Evangelistic Methods’, Ministry, April 1940.
7 W. H. Anderson, ‘Missionary problems Considered’, Ministry, October 1033.
8 W. H. Anderson, ‘Work Among African Natives’, Ministry, July 1946.
9 W. H. Anderson, ‘Vetean Missionary Answers Questions’, Ministry, September 1935.
마이클 소쿠파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있는 헬더버그 대학의 교무처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