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음식
라엘 시저
하루 일과 중 만나를 거두는 일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원망하여…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1~3).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왜 하나님은 애굽에서 우리를 죽이지 않은 거야!” 하나님께서는 얼마 전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지만 지금 그들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다. “거기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라고 항변하고 있다.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발언인가!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먹을 것이 없지도 않았다. 그들은 엘림에서, 달콤한 물과 대추야자가 있는 곳에서 방금 여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고기 가마를 갈망했던 것이다(출 16:3). 채식주의에 대한 글을 쓰자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의 무엇이 그렇게 좋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어 했을까? 하나님께서는 파라오의 폭정에서 이들을 막 이끌어 내셨는데 그들은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를 성경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빗대어 말한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예수님과 그 희생의 호소에 등을 돌리고 그분께서 방금 전에 건져 내신 구덩이로 다시 들어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놀라우신 하나님
“그래. 돌아가고 싶단 말이지? 그러면 가라!” 나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 같으면 그냥 포기해 버릴 것이다. 최선을 다해 돕고 있는데도 짜증 내고 불평하면서 나를 모욕하다니.
하지만 놀라우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그분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수치와 희생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에 하나의 증거를 보여 주신다.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출 16:6, 7).
출애굽기 6장 6, 7절에 제시된 하나님의 기준으로 16장 6, 7절의 말씀을 해석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드라마를 즐기지 않으신다. 6장에서 하나님은 이집트 사람에게 행하시는 것을 그들이 본다면 ‘너희를 빼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에스겔에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대략 60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실 때(겔 6:7, 10; 11:9, 10) 그분이 웃고 계셨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기분이 좋아서 메추라기 고기를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행하신 일을 보면 그 사실이 더 분명해진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민 11:33; 시 106:15).
그분의 경이로움을 잊어버린 사람들로 번민하실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그분은 잊지 못할 방법을 고안하셨다. 그것이 바로 만나였다.
만나
만나가 무엇인가? 나는 모른다. 이스라엘도 몰랐다. 그래서 ‘만나’라고 불렀다. 그들은 만나를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출 16:15, 31)라고 말했다. 알다시피 만나는 가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품목이 아니다. 만나를 이전에 본 사람은 없다.
만나는 무엇인가? 만나는 음식이다. 특별히 인상적이지도 않으며 이상하게 생긴 음식이다. 별 다섯 개짜리 음식점이나 배부른 아이들이 여전히 멋들어지게 불만을 표시하는 세련된 대학 구내식당 같은 곳에서 나오는 음식이 아니다. 출애굽기 16장 14절에서 만나를 묘사하는 세 표현은 ‘작다.’ 혹은 ‘가늘다.’, ‘싸라기 같다.’였다(새번역 참조).
여기서 ‘가늘다.’는 것은 파라오의 꿈에서 두 번째로 나온 흉측하고 뼈만 앙상한 옥수수와 소들을 보고 한 말과 같다. 만나는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한 것이다. ‘싸라기 같다.’는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주 독특한 표현이다. 히브리어에서 뜻이 가장 가까운 것은 기본적으로 ‘껍질을 벗기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람어 동사이다. 좀 더 세분화하면 ‘곡식을 빻다.’라는 뜻이 있다. 절구질을 하면 낱알을 얻는다. 두드리고 땀을 흘리고 겉껍질을 불어 내고 마침내 식량을 얻게 된다.
만나는 노동이 필요하다.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을 줍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땀을 흘리고 절구질을 했을 것이다. 당신이 떡을 먹을 수 있도록 누군가는 피를 흘렸다. 그래서 만나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만나를 “힘센 자의 떡”이라고 부른다(시 78:25).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 우선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침실에서는 받을 수 없다. 잠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일을 미루면 안 된다. 문자, 전화, 주식 시세, 신문에 눈길을 먼저 돌려서는 안 된다. 하루 일과 중 만나를 얻는 일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이불을 치우고 신선한 공기가 가득한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만나를 거두어 가야 한다. 당신은 일찍 일어나서 일찍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나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면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출 16:21).
만나로 하루를 시작하라. 어떤 것도 만나보다 앞서면 안 된다. 만나가 첫째다. 해가 뜨기 전에 모두 일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매 아침의 양식을 얻기 위해 땅에 엎드려야 한다. 만나는 비타민 C와 같다. 많이 비축해 두고 잠시 동안 잊고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 얻어야만 한다. 매일 그날의 분량을 얻는다. 매일 아침 일찍 얻는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거두어 주지 않는다. 각자가 필요한 만큼 거둬야 한다(출 16:16, 21).
만나는 찬양이 담긴 행동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니
주를 향해 기도를 드립니다
주를 향해 제 눈을 높이 듭니다.”
기억하는 일
잊어버리는 순간 다시 주식 소식, 정치적 사건, 자연재해, 전쟁으로 관심이 쏠린다. 이스라엘이 배고픔을 해결했을 때처럼 말이다. 분명 우리에게도 만나가 필요하다. 만나는 기억에 관한 문제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잊지 않게 해 준다. 배신과 용서 그리고 반역 섭리의 40년 동안 만나는 매일 이른 아침 들판에 내렸다. 금요일에는 갑절로(출 16:22) 그러나 안식일에는 하나도 없었다. 만나는 저장해 놓으면 하루 만에 상해 버린다. 만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법궤 안에 그 항아리를 놓아둘 때 영원히 보존된다(33절).
안식일처럼 만나도 기억에 대한 기적이다. 결코 상하지 않는 기적의 항아리는 십계명과 함께 법궤에 보관되어 해야 할 것과 멈추어야 할 것, 노동을 통한 순종과 쉼을 통한 순종의 주기를 완성시킨다. 엿새의 하나님은 제칠일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매일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며 또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매주 그리고 영원히 쉼을 얻는다.
만나는 그분의 말씀을 존경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 안식일도 같은 문제다. “일곱째 날은…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 10). 그러므로 만나와 안식일은 연결되어 있다. 안식일의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산 떡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놀라운 만나의 기적이다(요 6:51, 58).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구함으로써 살아간다. 하루 일과 중 만나를 거두는 일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라엘 시저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부편집인이며 만나의 맛을 참으로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