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중앙아프리카지회 재림교회
– 제프리 음브와나
아프리카의 동부와 중부 11개 국가를 포함하고 있는 동중앙아프리카지회(ECD) 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성장은 겨자씨 비유에서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에 따르면 겨자씨는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를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막 4:32, 표준새번역).
2013년 말 동중앙아프리카지회 내 침례 받은 재림교인은 264만 8,520명이며 조직 교회 1만 1,549곳, 안수 목사와 인준 목사는 2,090명이다. 목사 1명이 1,257.4명을 목양하고 있는 형편이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를 훈련시켜 선교에 투입해 왔다.
50만 명이 넘는 학생이 2,000여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의 인가와 정부의 인증을 받은 대학들에서 교육받고 있다. 병원 6곳과 시골 진료소 130곳을 통한 재림교회 의료 및 보건 활동은 지역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6,000명이 넘는 문서 전도자가 해마다 건강과 종교에 관한 서적을 보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께서 이 지역 신자들의 삶에 크게 역사하고 계시다.
사업의 시작
조상 숭배, 정령 숭배, 미신 숭배 전통 종교가 깊이 뿌리박은 이 지역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19세기 후반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초기 재림교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동서남북 사방에서 유입되었다. 광활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대륙으로 들어가는 동쪽 관문은 오늘날 탄자니아로 알려진 탕가니카였다.
19세기 유럽 재림교회 중 교세가 가장 센 곳은 독일이었다. 독일 교회에서 활동적인 지도자였던 L. R. 콘라디는 세계의 여러 곳에서 ‘외방’ 선교 사업을 활발하게 일으켰다. 제정 독일이 동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했기 때문에 독일 교회는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알려진 지역에 선교사들을 파견했는데 이 지역에 오늘날 탄자니아, 르완다, 부룬디 같은 국가들이 들어섰다.
콘라디는 동아프리카에 최초의 선교사들을 파견하기 위해 미화 5,000달러를 모금했다. 유럽과 미국의 개인 독지가들과 교회의 몇몇 기관이 이 모금에 참여했다. 콘라디는 1902년 10월 22일에 독일 정부에 탕가니카로 선교사 파견 허가를 신청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당시 독일령 동아프리카 지사인 구스타프 아돌프 폰 고첸이 휴가차 베를린에 와 있었는데 콘라디가 그를 찾아가 면담했고 콘라디는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다.
초창기 선교사들
목회를 준비하고 있던 정원사 아브라함 C. 엔스와 독일 재림교회의 출판소에서 일하고 있던 요하네스 엘러스가 최초의 선교사로 선임되었다. 이 두 사람은 1903년 10월 22일에 동아프리카로 향하는 증기선 제너럴호에 승선했는데 이때 엘러스의 아내와 엔스의 약혼자는 동행하지 못하고 뒤에 남아 있어야 했다.
두 선교사는 비용을 아끼느라 3등석 표를 구입했다. 처음에는 탕가니카 북부에 있는 빅토리아 호수 근처에 미션 본부를 설립할 계획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호수를 이용하면 쉽게 선교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03년 11월 9일에 오늘날 탄자니아의 경제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하자 주지사가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청했고 탄자니아 동북부로 가라고 알려 주었다. 11월 25일에 그들은 독일 교회에 전보를 띄워 와파레 종족이 살고 있는 파레 산맥 남부에 최초의 선교 본부를 설치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골짜기에 정착한 다음 그곳을 ‘프리텐스탈(평화의 골짜기)’이라고 불렀다.
새 선교사들은 설교만 하지 않고 학교와 진료소를 설립했다. 일부 족장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와파레 부족 수많은 학생이 이 학교들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전인적 인격 형성을 위해 노작 교육과 실업 교육을 강조하는 재림교회의 교육 철학은 정부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중 하나인 키후리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목화를 경작하여 1만 500파운드를 수확했고 이듬해 미화 600달러어치 수입을 올렸다. 주지사는 학교를 방문하여 미화 150달러 상당의 도서를 기증하였고 학교에 보낸 서한에서 “키후리오 선교 학교가 효과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어 만족스럽다.”고 전했다.
1908년 4월 4일 이전에 와파레 부족 남자 6명이 처음으로 재림교회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중에서 목회자와 교사들이 배출되었다. 선교 사업이 진전되면서 해외 선교사들이 와파레 부족 출신 전도자들과 동행하여 빅토리아 호수 주변의 다른 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므완자와 마라 지방으로 선교를 떠났으며 그곳에 선교 센터, 학교, 진료소를 세웠다.
양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교회 사업은 심각하게 타격을 입었다. 독일 선교사와 지역 교인 여러 명이 죽었고 어떤 이들은 전쟁터로 징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말미에는 영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독일 선교사 대부분이 투옥되거나 출국했다.
식민 정권이 영국으로 이양되면서 외국 선교사들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는 교회 기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래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시작한 교회 기관을 아프리카 본토 교인들이 떠맡았다. 파레 지역에서 독일 선교사들이 세운 26개 학교 중에서 15개 학교가 전쟁 중에도 계속 운영되었다. 캠퍼스와 건물들은 학교에서 교육받았던 본토인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다.
빅토리아 호수 지역에서는 캠퍼스 대부분이 전쟁 통에 파괴되었다. 외국 선교사를 수행하였던 와파레 부족 출신 전도자들은 제 고장이 아닌 곳에서 급료도 받지 않으면서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교회 사업을 계속 유지했다. 지역 주민은 그들의 봉사를 높이 평가했다. 그들이 봉사한 지역의 고위 공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 때문에 독일인들이 남겨 두고 떠난 와파레 부족의 교사들은 독일인들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더 훌륭하게 봉사했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에게 자기의 옷을 나누어 주었다.” 전쟁은 1918년에 끝났지만 이후 오랫동안 선교사들은 탕가니카에 들어오지 못했다.
1922년, 탕가니카 재림교회는 침례 받은 신자 266명, 선교 본부 16곳, 교회 6곳, 학교 43곳, 등록 학생 2,370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과 종전 이후 교회 사업은 여러 난관에 봉착했었으나 사업 자체는 중단되지 않았다. 1960년에는 교회가 이 나라의 북쪽 지역에 학교 176곳을 열었다. 2013년 12월 현재 탄자니아에는 침례 받은 재림교인 47만 7,273명, 학교 여러 곳, 대학교 1곳, 진료소 45개소, 병원 1곳 그리고 건축 중인 대형 병원 1곳이 있다. 탄자니아 재림교회의 신속한 성장으로 현재 북탄자니아연합회와 남탄자니아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진실로 하나님의 왕국은 겨자씨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씨앗처럼 뿌리자.
– 제프리 음브와나
현재 대총회 부회장이며 동중앙아프리카지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