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라오디게아는 남북과 동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에베소에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에베소에서 유프라테스로 가는 길은 라오디게아가 위치한 골짜기를 직접 통과한다. 라오디게아는 상업, 금융, 교육, 의료의 중심지였다. 키케로는 여행 중 라오디게아에서 채권을 현금으로 바꾸었다. 서기 61년에 지진이 그 도시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을 로마가 돕겠다고 했을 때 독립심 강하고 자부심이 넘치는 라오디게아 주민은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도시를 재건하고자 했다.
그 도시는 소아시아에서 인기 있었던 흑단 의복으로 유명했다. 효과가 좋은 안약이 이곳에서 개발되었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하고 세련된 도시였다. 이러한 물질주의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미지근하게 되었다.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열정은 더 이상 없었다. 영적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잠들어 있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영적 경험을 새롭게 하라는 진심 어린 호소이다.
1. 요한계시록 3장 14절을 읽으라. 사도 요한은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기별을 소개하기 위해 예수님을 어떤 세 가지 호칭으로 부르는가?
요한이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기별을 소개하며 사용한 세 가지 호칭은 의미심장하다. 라오디게아는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시 오기 직전에 교회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를 지닌 “아멘”이시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을 알고 계시면서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우리가 그분에게 신실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에게 신실하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시작)”이시다. 이 표현은 약간 혼돈스러울 수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근본”의 원래 단어는 ‘시작하셨던 분’이나 ‘시작하신 존재’로 번역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창조의 근본이시다.
전능하신 창조주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재창조의 기적을 행하고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불어넣겠다고 약속하신다.
2. 요한계시록 3장 15~17절을 읽으라.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진단하시는가? 예수께서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그들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다. 얼마나 적절한 상징인가! 그곳은 광천수가 상수도 시스템을 통해 흘러나오는 히에라폴리스에서 1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물이 그곳에 도착할 때는 미지근해졌다. 라오디게아 주민들은 예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분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고 냉담하고 무관심했다.
3.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들의 관점은 예수님의 관점과 어떻게 달랐는가?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읽으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떠한 형편인지를 현실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는 자신을 종교적이고 거룩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주 다르게 보신다.
4. 성경은 그리스도의 의와 분리된 인간 본성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이사야 64장 6절, 예레미야 17장 9절, 로마서 3장 10, 11, 23절을 읽으라.
5.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권면은 어떤 것인가? 요한계시록 3장 18절을 읽으라.
신자들은 종교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참된 영성의 본질을 이해하는 일에는 실패했다(요 9:39~41).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예수는 눈먼 자를 보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교회에게 “지혜의 영”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하였다(엡 1:17, 18). 안약으로 유명한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참현실을 이해하고 그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영적 분별력을 주시는 분은 성령뿐이다.
6. 요한계시록 3장 19절을 읽으라. 왜 예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이토록 날카로운 질책의 기별을 주셨는가?
7. 요한계시록 3장 20, 21절을 읽으라. 예수께서는 무엇을 하길 갈망하시는가? 그리고 그분은 어떤 약속을 주셨는가?
예수께서는 우리와 친밀해지기를 원하신다. 상징적으로 표현한 중동의 멋진 만찬에서처럼 그분은 우리와 함께 식탁에 자리하여 대화를 나누고, 우리의 내적 갈망에 귀 기울이고, 우리 심령에 용기를 주시는 존재이다. 예수와 함께하는 이런 특별한 순간은 절대 놓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지금 예수와 사귀는 사람은 그분과 보좌에 함께 앉을 것이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