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20년 후 지금은

구 캠퍼스에서: 2004년 뮤덴데 미래 연구위원회 위원 몇 사람이 옛 캠퍼스를 점검하고 있다. 왼쪽부터: 무투쿠 무팅가 교수, 클라우드 리츨리, 요제프 질바시 총장
몰살당한 일가족: 뮤고네로 병원 외과 의사 제시 타바란자 박사와 서르완다합회장 조수에 루시네 목사가 대학살 중 사망한 가족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
“지옥에는 악마가 없다. 모든 악마는 르완다에 모여 있다.” 어느 선교사가 이같이 말했다. 이는 1994년 5월 16일 자 <타임>지의 표지 제목이기도 하다.1 비극적인 1994년 어느 봄날, 그 표지를 보고 나서 온몸이 부르르 떨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부친과 친구들은 무덴데에 있는 중앙아프리카 재림교회 대학교(AUCA)에서 선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중앙아프리카 고원 지대에 한적하게 자리 잡은 이 아름다운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웬만한 일에 꿈쩍도 않는 서구 세력을 제외한다면, 종족 간의 증오와 파괴로 100일 동안 100만 명이 무참히 살해당한 이른바 ‘대학살’의 현실 앞에 가슴 떨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2004년 4월 첫째 주에 나는 새로 조직된 동중앙아프리카지회 소속 대표단 자격으로 르완다 무덴데를 찾아갔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다 허물어져 가는 캠퍼스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조사하는 일이었다. 나는 <타임>지에서 ‘르완다의 킬링 필드’라고 불렀던 지점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재림교회 기관이 있었다. 과학관으로 피난한 1,000명 이상이 광분한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우리 학생 32명도 목숨을 잃었다.
비룽가 산맥의 동쪽 산비탈에 위치한 이곳은 해발 약 2,100미터로 항상 엷은 안개에 뒤덮여 있다. 내 눈에는 과거의 망령을 떨쳐 버리려면 앞으로도 영원히 몸부림쳐야 할 것처럼 비쳤다. 참으로 이 나라 전체가 아직도 비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방의 분위기가 침울했다. 농경지는 경작되지 않은 채로 버려졌고, 검게 그을린 나무 그루터기가 황폐한 현장을 말없이 증언했다. 곳곳마다 집들이 파손되어 있었다.

폐허: 2004년 뮤덴데 캠퍼스에 남아 있는 옛 중앙 건물
신축 캠퍼스: 키갈리 근처 중앙 아프리카 재림교회 대학교(AUCU)의 중앙 건물
르완다의 수도인 키갈리 역시 무기력했다. 교통수단은 전무했다. 천성적으로 내성적인 르완다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상실감에 빠져 슬픔과 싸우고 있었다. 가족 전체가 사라진 집도 있었다. 과연 이 나라가, 이 교회가, 이 교회의 자랑이었던 무덴데 캠퍼스가 비극을 받아들이고 지옥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르완다에 이미 교회의 부활을 위해 건축가들을 투입하셨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희망을 짓는 건축가
그들은 모두 4개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먼저, 공산 정권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헝가리에서 연합회장을 역임하며 품성과 결단력을 검증받은 요제프 질바시는 2001년 르완다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중앙아프리카 재림교회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봉사하기로 하고 아내 수자나와 함께 르완다로 왔다. 당시 그의 사무실은 키갈리의 기슈슈에 위치한 작은 캠퍼스에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캠퍼스의 열악한 상황을 목격한 질바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곳은 대학 캠퍼스가 아니라 아무 시설도 없는 초등학교 같았다. 도서관은 딱 미국 가정의 거실 크기였다. 그의 사무실에는 작은 책상 하나, 책장, 손님을 위한 의자 하나가 간신히 들어갔다. 재학생은 320명에 불과했다. 본국으로 돌아가자는 아내의 끊임없는 성화에도 불구하고 질바시는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정 상태 양호: AUCA의 재정을 건실하게 만들어준 일등 공신, 앤지 파가리건 재무 담당 부총장
건축 전문가: 도미니크 파가리건은 AUCA 건축 전반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다.
미래릇 짓다: 기슈슈의 건축 부지를 살피고 있는 AUCU 대학 부총장 아벨 세바하쉬
대학살 이후 교회는 유엔 최고난민위원회의 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무덴데 피해 보상 정착 자금으로 20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질바시는 자금 일부를 활용하여 키갈리 시에서 마소로 언덕에 개간해 놓은 아름다운 부지를 구입했다. 바로 맞은편에는 국제공항이 있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해, 하나님은 필리핀에 살고 있는 젊은 부부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건축가인 도미니크 파가리건과 마닐라 애드벤티스트 병원의 재무 책임자인 앤지 파가리건이었다. AUCA에 도착한 도미니크는 새로운 부지에 건축 계획을 세웠고 앤지는 회계학을 가르쳤다. 질바시와 뜻을 함께했던 그들은 이 일이 단지 대학의 재탄생을 예고할 뿐 아니라 르완다 전체 교회의 터를 닦는 일이었음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당시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바위투성이였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은 무덴데 캠퍼스를 처리하는 문제였다.
전환점
2004년 5월 13일, 키갈리의 노보텔 호텔에서 역사적인 회의가 개최되었다. 전반기를 마감하는 동중앙아프리카지회 운영 위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것은 무덴데의 미래와 직결된 조사 위원회의 보고 내용이었다. 케냐의 대학 교수인 무투쿠 무팅가를 필두로 위원회에서는 황량한 캠퍼스를 구입하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마소로 언덕에 캠퍼스 개발을 계속 진행해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상당수 위원들이 무덴데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학생, 직원이었던 그들은 친구의 죽음을 면전에서 지켜보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자 르완다 교회의 역사가 담긴 곳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았다. 무덴데에 다시 기회를 주자는 호소의 열기가 뜨거웠다.
마침내 공정하고도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로 유명한 동중앙아프리카지회장이자 위원회 의장인 제프리 음브와나 목사가 찬반 의견을 요약하여 표결에 부칠 것을 제안했다.2 모든 이가 숨죽이고 최종 투표 집계 결과를 기다렸다. 몇 표 차이로 위원회의 제안이 가결되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길이 활짝 열렸다.
새로운 미래
이후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는 천지가 개벽한 마소로 언덕을 방문하게 되었다. 무덴데의 미래를 위한 위원회의 초대 위원이자 신임 대학 부총장인 아벨 세바하쉬가 널찍한 사무실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군데군데 건물이 들어선, 교회의 자랑이 된 아름다움 캠퍼스가 창밖에 내려다보였다. 이 건물들은 도미니크가 설계하고 건축했다. 그동안 재정 관리는 아내인 앤지가 꼼꼼하게 맡아 주었다.
2006년에 앤지는 혼란한 상황 가운데서 재무 최고 책임자를 맡아 재정 기반을 견실하게 회복시켰다. 세바하쉬 부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4년간 앤지는 아마 고고학을 연구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회계 장부는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상태였죠. 회계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았고 자금 운용 역시 최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돈을 절약하여 기슈슈의 새로운 캠퍼스뿐 아니라 이 아름다운 캠퍼스를 빚지지 않고 지을 수 있었습니다.”

급성장: 루헹게리의 갈릴라야 교회가 완공되면 2,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초등학교 같았던 건물은 싹 헐어 버렸고 그 위에 IT 관련 학부와 경영학과 학생을 수용할 교실 24개를 갖춘 큰 건물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재학생은 320명에서 3,200명으로 급증했다. 교육학과, 신학과, 소프트웨어 공학과, 보건학과, 수학과, 경제학과, 지리학과 그리고 의과 대학이 추가 신설될 예정이다.
나라의 미래를 짓다
몇 달 전, 세바하쉬와 부총장 대리 은다하요가 르완다 교육부장관에게 초대받았다. 장관은 르완다에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한 대학에 감사하며 이들의 노고를 치하한 후 정부의 요청 사항을 전달했다. AUCA가 르완다 최초로 의과 대학을 설립할 계획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정부가 인턴 과정과 장학금을 지원하고 협력 기관과 교류하도록 도울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400만 달러가 필요하지만 2015년 9월 첫 신입생을 맞기 위해 계획을 추진 중이다.

키갈리에 신축 중인 르완다연합회 본부
내일의 주역들: 루헹게리의 재림교회 학교의 어린이들은 재도약하는 나라의 밝은 미래를 그릴 수 있다.
또 다른 건축가
“대학의 재탄생이 곧 교회의 재탄생입니다.”라고 말한 헤스론 빌링기로는 르완다 출신의 재원이다. 학력과 실력이 뛰어나며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로 미국에서 수년 동안 교육받은 후 미국 시민이 된 사람이다. 그는 미시간 주 앤드루스 대학에서 두 개의 석사 학위(신학과 경영학)와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어디서든 성공적인 미래를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느 아프리카인과는 달리 그는 2003년 르완다연합회 부재무를 맡아 아내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래 교회의 재정적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절차와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첫 2년을 할애했다. 2005년에는 르완다연합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키갈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오후에 나는 공사 중인 9층짜리 건물 옥상에 헤스론과 함께 서 있었다. 키갈리 시내에서 한 블록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 건물 주변에는 대사관들이 밀집해 있다. 앞으로 르완다 재림교회의 새로운 본부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다. 건물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무실을 임대하여 얻는 수익은 대학에 영향을 미치는 학교,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질 병원, 교회 건물 등을 개발하는 데 사용된다.
평소 조용한 편인 헤스론은 이런 계획을 논의할 때는 이상하게 힘이 넘쳤다. 르완다 중심에 위치한 기타라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더 큰 안목으로 그곳에 현장 사무소를 세웠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중등학교를 추가 신설하여 젊은이들을 끌어모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현재 교실 24개를 마련했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또 이곳에 있는 기숙사 두 곳에는 학생 8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교리와 선교 사업에 대해 알려 주고 싶습니다. 정부에서 매각하려고 내놓은 땅을 발견하고 땅을 놓칠까 봐 곧장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AUCA에서 그 땅을 사용하겠노라 말했습니다. 도미니크 파가리건이 이미 기본 설계를 마쳤습니다. 드디어 중등학교와 선교 본부를 비롯하여 대학 분교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이 도시에서 우리 교단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 감히 확신합니다.”
르완다 여행 중에 헤스론 빌링기로는 무고네로 애드벤티스트 병원 옆에 신설된 간호학교를 보여 주었다. 정부의 인가를 받는 즉시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콩고 민주 공화국 국경 근처의 기세니에서 제법 규모가 큰 중등학교와 새로운 공사 현장을 보여 주었다. 그 부지는 한 평신도의 도움으로 매입했다. 위치가 좋고 이전에 다른 교파의 신도들이 빌려 쓰던 창고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재림교회에서 그곳을 매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 중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 교회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부지에서 전도회를 개최한 결과 140여 명이 침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현재 이곳은 교인들로 넘쳐 나고 있다.
루헹게리에서는 불과 1년 전에 조직된 갈릴라야 교회를 방문했다. 현재 교인 수는 324명이지만 몇 년 안에 2,000명으로 늘리자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고 한다. 새 건물을 짓는 공사도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같은 마을에서 2,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두 개나 짓고 있다.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도 마무리 공정만 남았다.
AUCA 졸업생이자 현재 북르완다합회장인 제라드 카라시라 목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신축 공사 현장을 보여 주었다. 사무실이 널찍한 현대식 3층 건물로 자체 서버는 물론 연합회, 대총회가 연결된 선플러스 회계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2014년 4월, 르완다 대학살이 발생한 지 정확히 20년이 지났다. 지금은 현격하게 달라졌다. 당시 국가는 증오로 거의 멸망할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발전하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국민들은 상대방을 용서하며 함께 일하는 방법을 배웠다. 부정부패가 줄어들었고 법과 질서가 회복되었다. 규율이 재정비되었다.3 국가는 정상을 회복했고 아프리카의 롤모델로 부상하고 있다. 르완다에서 재림교회는 풍부한 영감과 영적 능력 그리고 지적 발달의 원천이 되고 있다.
– 클라우드 리츨리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부편집인이다.
1 참조 “Why? The Killing Fields of Rwanda,” TIME Magazine, 웹사이트 링크
2 제프리 음브와나 목사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대총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 사이드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