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에서 나옴
유로아시아지회 재림교회의 성장
유진 자이체프
1917년 10월, 러시아 제국의 대격동기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다른 교단과 마찬가지로 낯선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공산주의가 권력을 차지하자 러시아 내에서 종교 자체가 문제시되었다.
정부의 변화로 말미암아 내전(1918~1922)이 발생했고, 나라 전체에 티푸스, 페스트, 천연두,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백만 명이 집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인본주의가 부른 재앙을 못 본 체하지 않고 고통 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세계적인 재림교회 단체를 조직하였다. I. A. 리보프가 설립한 구호 기구는 구호품을 배분하고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였다.
소비에트에 소개된 ‘신경제정책(The New Economic Policy, NEP)’은 종교와 관련하여 정부의 입장을 누그러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1920년대 중반에는 그나마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교회가 사명을 이행할 기회가 있었다.
교회의 반응
1924년 8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연방 내에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제5차 총회가 열렸다. 이는 교회가 전도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였다. 제5차 총회의 모든 결의는 대부분 사회적 성격이 짙었다. 특히 총회 대표자들은 교회가 문맹 퇴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의료 기관과 집단 농장 조직을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소비에트 연방 체제 초기 10년 동안 재림교회는 여러 선교적인 사업을 통해 교인 수를 두 배 이상 증가시키는 복을 누렸다. 또한 출판 사업이 크게 성장하여 <진리의 소리(Voice of Truth)>, <전도자(Evangelist)>, <재림의 전령(Adventbote, 독일어)> 잡지가 정기적으로 발행되었다. 복음주의 교단과 침례교와 제휴한 국립 출판소는 두 가지 성경을 인쇄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각각 5,000권의 성경을 배분받았다. 재림교회는 ‘형제 노동’, ‘새로운 길’, ‘광명의 나라’와 같은 이름으로 집단 농장을 조직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농업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다시 변한 상황
그러나 스탈린의 등장은 그동안 누리던 상대적 자유마저 비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1929년에 새롭게 채택된 법률은 교회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제거했고 심지어 인도주의적인 사업도 금지되었다. 수정된 헌법은 신앙을 포교할 신자들의 권리를 부정했다. 군부의 무신론자들은 종교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1930년대에 일어난 대규모 탄압이 교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1931년 교회 조직은 와해되었고 지역 교회 활동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그 대신 독립적인 형태의 교회가 발전했다. 어떤 형태로든 지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5인회로 구성된 총연합 위원회가 조직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모든 위원이 박해를 당해야 했다.
재림교회는 이 기간에 심각한 시련을 경험했다. 특히 넷째 계명을 고수하는 재림 신자들은 ‘기생충’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투표권뿐 아니라 식량을 배급받을 권리마저 박탈당했고, 상당수의 신자가 체포되었다. 150명 이상의 설교자와 지역 교회 장로들 그리고 3,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고문을 당했으며 목사를 잃은 교회들은 당국의 압력에 의해 해체되었다.
1938년 교회 지도자 H. J. 뢰브자크는 고문을 당하다가 옥사하였다. 그는 체포 직전에 마지막으로 “형제들, 실망하지 말고 일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강물과 같아서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역설적이게도 제2차 세계 대전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종교를 구해 냈다. 정부와 종교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44년에 독일로부터 행방되면서 재림교회 사업도 재개되었다.
타오르다 꺼진 희망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박해와 배반, 수용소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듯이 보였다. 신자들의 마음속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불타올랐다. 1955년에서 1957년까지는 전후 역사에서 신자들이 가장 자유로웠던 시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자유의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50년대 말 무렵 종교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이 전개되었다. 신자들의 권리는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청소년들을 타락시키고 사회에 기생한다는 죄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공개 재판에 넘겨졌다. 정부 관리들은 ‘분할 통치’ 전략을 사용하여 교회 내부 문제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다. 1960년 12월, 교회는 사실상 해산되었다. 또다시 교회의 연합을 시험하는 혹독한 시련이 불어닥친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르러 세계 교회 지도자들은 구소련 교회와 다시 접촉하기 시작했다. 시어도어 카키치, A. 로네, 로버트 피어슨, 닐 C. 윌슨 같은 대총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연합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980년대 후반에 공산 정권과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교회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사회 제도의 조정과 관련하여 정부와 종교 사이의 관계가 급격하게 변하였다. 특별히 종교 통합에 대한 새로운 법률은 양심의 자유를 인정했다.
소비에트 이후의 재림교회
소비에트 이후에 재림교회 조직은 세계 교회 모델을 기초로 삼았다. 여러 지역에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1988년은 매우 중요한 해로 기록된다. 오랜 고난의 역사 끝에 최초로 러시아 툴라 지역에 목회자 양성을 위한 자오크스키 신학대학원이 설립되었다. 급속한 교회 성장을 위하여 미래의 목회자를 체계적으로 훈련하는 교육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1990년에 열린 대총회에서 대표자들은 구소련 지역에 유로아시아지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재림교회 라디오 ‘희망의 소리’ 방송이 최초로 송출되었다. 초기에 방송국 직원들은 청취자들로부터 하루에 300~500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1991년 구소련 지역에 있는 재림교회에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에 최초의 기독교 출판소 ‘생명의 근원’이 자오크스키에 건립된 것이다. 신자들은 처음으로 복사된 자료가 아닌 인쇄된 신앙 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전도 활동은 유례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전국에 걸쳐 여러 도시에서 수많은 전도회가 개최되었고 수천 명이 하나님께 돌아왔다. 1990년대 전반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곳은 구소련연합회였다.
모스크바의 재림교회는 1992년 3월 크렘린 궁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새로운 삶의 길’이라는 전도회를 개최하였다. 사람들은 크렘린 궁에 입장하기 위해 표를 구입해야 했다. 하지만 집회 일주일 전에 1만 4,000장이 매진되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갖가지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숙달된 설교자의 부재, 미비한 교회 건물, 신앙 서적의 부족, 새 신자를 양육해야 하는 문제 등 과제가 산적했다.
따라서 교회는 인프라를 강화하고, 교육에 집중하며, 새로운 전도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한편 교회는 여러 종교 단체와 함께 국제종교자유협회 지부를 개설하는 등 종교 자유의 원칙을 옹호했고, 교육 협회를 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론
현재 유로아시아의 재림교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가 태동하고 발전하는 동안 험로를 지나올 수 있도록 안전하게 인도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유진 자이체프
유로아시아지회의 성경연구소장이다.
캡션
크렘린 궁 : 흐루쇼프가 공산당을 위해 세운 컨벤션 센터(왼쪽)에서 1992년 대규모 재림교회 전도회가 개최되었다. 1,300명 이상이 침례 받았고 모스크바에 새 교회가 여럿 탄생했다.
선구자들 : 제칠안식일예수재림교 제5차 총회 대표단이(왼쪽)이 1924년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90년 전 : 1924년 러시아에서 모인 총연합 위원회 참가자들(왼쪽 위). 1930년대에 이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다.
죽기까지 충성 : 소비에트 연방 재림교회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H. J. 뢰브자크(오른쪽 위)는 1938년 수감 도중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