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아침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 부활
프랭크 M. 하젤
죽음은 치명적이고 심각하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거기에 뒤따르는 심각한 고통과 슬픔을 안다. 죽음은 나이, 성, 인종,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행사한다. 죽음은 변치 않는다. 그것은 뒤집을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사라지면 그 고통과 슬픔은 너무도 강렬하다. 죽음은 관계, 생명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것은 사랑의 정반대이다. 성경은 죽음의 기원이 죄라고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바울은 기록한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그렇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 그분은 불멸이시다(딤전 6:16). 불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타나시아(athanasia)’는 말 그대로 ‘불사(不死)’를 뜻한다. 하나님은 썩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는 죽음이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망을 정복하시고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불멸
불멸은 우리가 창조하고 소유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적 속성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불멸이 하나님의 특권이라고 말한다(17절). 불멸은 그분 안에 있다. 하나님은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그분 자신 안에 생명이 있다(요 5:26). 그분은 영원히 사신다. 인간 또한 영원한 삶, 영원한 젊음을 원하기에 이 하나님의 특성에 대해 한없이 욕심을 낸다. 불멸은 그것을 탐하는 사탄 역시 지니지 못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처음으로 하와를 유혹할 때 그녀가 결코 죽지 않으며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 것이라고 암시했다. 이 유혹에 성공하여 지구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에게 다르게 말씀하셨다(창 2:16, 17).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으로 인해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하나님과 분리되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 이른다. 그리고 고통과 아픔이 따른다.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는 사탄의 교묘한 암시 때문에 요사스런 가르침과 심령술에 기반한 행태들이 생겼다.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인간이 존재할 수 있으며 죽은 자와 접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속임수를 믿는다(신 18:10, 11). 성경은 죽은 자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분명하게 진술한다(전 9:5, 6, 10). 죽음은 무의식의 수면 상태와 같다(시 115:17; 욥 14:12). 사망할 때 우리의 신체에서 자유를 얻은 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비성경적인 믿음을 만들어 낸 사탄은 우리 몸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죄가 영원히 존재하도록, 멋진 솜씨로 불멸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강탈했다. 죄인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끝없는 고통을 받는다며 무한히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속성을 죄에 부여한다. 이는 악인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겔 33:11), 대적의 고난도 즐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왜곡시킨 것이다. 불멸하는 영혼이란 개념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악의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 개념대로라면 죄가 영원히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죄가 결국은 뿌리 뽑힐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죄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서 죄의 모든 흔적은 깨끗이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새 땅은 더 이상 사망과 아픔과 고통과 눈물이 없는 곳에 세워질 것이다(계 21:3, 4).
죽음을 정복하다
모든 과학적 지식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죽음이 가져온 슬픔과 고통은 너무도 커서 인간들에게는 어떤 해결책도 없다. 하나님이 해결하셔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생명의 소멸을 돌이키고 죽음을 정복하신다. 죽음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친구가 아니며,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고전 15:26)로 불린다.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한다. 생명이 끊어지면 의식도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의식하신다. 그분은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억하신다. 사랑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다시 보기 갈망하신다. 우리가 죽음에 둘러싸이고 어디 있는지 모를 때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다.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그 사랑 때문에 희망이 존재한다. 무덤에서 부활한다는 희망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다시 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희망이다. 예수는 인격화된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부활 소망의 근원이시다(롬 6:23; 딤후 1:10; 고전 15:22). 결국 사랑이 승리한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강력하게 입증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 무덤은 비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살아나셨다.”(눅 24:34)라고 제자들은 기쁨에 겨워 선언하였다. 그분이 살아나셨다! 사망은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분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제자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보다 강하셨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그분께는 기적이 일상이다.
큰 날이 임할 때
인간은 몸으로 존재하며 부활도 몸이 연관된 사건이다. 우리는 유령처럼 허공을 떠돌아다니지 않고, 예수께서 그러했듯이(눅 24:39, 40),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부활하여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믿는다(행 1:11).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다(고전 15:14). 예수께서 여전히 죽어 계시다면,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셔서 우리가 승리의 삶을 살도록 하시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여전히 죽어 계시다면, 재림의 소망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분께서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수 없으실 것이다! 예수께서 여전히 죽어 계시다면,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여전히 죽어 계시다면,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그분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여전히 죽어 계시다면, 죄를 용서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도 구주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여전히 죽어 계시다면, 우리는 부활에 대한 아무런 소망도 없을 것이다(고전 15:17, 18). 그러나 복음이 여기 있다. 그분께서는 살아나셨다. 예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14:6) 그분은 사망을 이기셨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도록 소망을 주셨다. 예수님께 찬양을 드리자!
프랭크 M. 하젤
오스트리아 보겐호펜 신학대학원 신학과장. 2009년 아내가 암으로 사망한 뒤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될 부활의 아침을 고대하고 있다.
사이드바
죽음과 부활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유일한 불멸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날이 되기까지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무의식 상태가 된다. 우리의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 있는 의인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만날 것이다. 둘째 부활, 즉 불의한 자들의 부활은 1,000년 후에 있을 것이다(롬 6:23; 딤전 6:15, 16; 전 9:5, 6; 시 146:3, 4; 요 11:11~14; 골 3:4; 고전 15:51~54; 살전 4:13~17; 요 5:28, 29; 계 2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