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윌리엄 로빈슨
사랑, 봉사 그리고 괴로움
자메이카 선교사였던 릴리 그레이스 로빈슨 페린의 소중하고 애달픈 사연이 담긴 소중한 일기를 공개한다. 2년 먼저 자메이카에 건너가 선교 활동을 벌인 약혼자 찰스 페린과 함께하기 위해, 그녀는 1895년에 고향인 네브래스카의 모래 언덕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다. – 편집실
1895년 10월 28일
기차에서 꼬박 밤을 샜다. 떠나온 고향 생각 그리고 새로운 고향이 될 곳과 찰리를 생각하느라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0월 30일
오후 4시, 배에 올라타자 증기선이 체사피크 만에서 벗어나 대양으로 진입했다. 갑판 위에 올라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을 바라보았다. 고향 땅을 향해 마음으로 작별을 고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11월 4일
내일 아침이면 자메이카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11월 6일
드디어 찰스가 있는 킹스턴 시에 도착했다. 몇 분 후면 2년간 만나지 못했던 내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의 복잡한 생각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오전 9시, 차를 타고 도시를 지나가며 아름다운 화원과 이국적인 집 모양에 감탄하고 있는데 드디어 하이 홀더만 스트리트 23번지 선교관에 도착했다. 찰스는 건물 밖에 차가 멈추기 무섭게 방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연인보다 만남의 기쁨을 더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찰리와 나는 우리가 살 새집을 보러 갔다. 그리고 저녁에는 장막 집회에 참석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미국인이었으며, 리처드슨 장로님이 말씀을 전하셨다.
11월 7일
찰리와 함께 공원에 갔다. 그는 안식일이 되기 전에 내가 이곳에 올 수 있을지 궁금하던 찰나에 성경을 폈더니 우연히 시편 21편 2절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그때 그는 내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아, 우리 모두 찰스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이 말씀하시면 찰스는 믿었다.
11월 8일
네티와 장을 보러 갔다. 웨딩드레스가 들어 있는 짐이 제시간에 도착할지 알지 못하는 데다가 찰스도 흰 드레스가 더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흰색 드레스를 샀다. 찰스는 기왕이면 꽃도 흰 백합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11월 9일 안식일
안식일학교와 안식일 대예배를 위해 예배당에 모였다. 찰리는 남학생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치는 동안 나는 옆에 앉아 있었다. 그를 볼 수 있고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는 내 사람이었다. 안식일학교가 끝나고 우리는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스트먼 형제가 성경을 인용하며 말씀을 선포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말하자 찰리는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는 기쁨과 행복과 감사의 마음을 “아멘”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혹시 자신이 한 말 때문에 내가 불쾌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나는 그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가 느낀 감정을 온 교회 사람에게 표현해 주었으니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도 더 기분 좋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내가 왔기 때문에 기뻤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에 공감했던 것이다. 저녁 식사 후, 나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찰리에게 말했다. 찰리와 나는 정말로 행복했다. 그는 내 것이었고 나는 그의 것이었다. 우리의 미래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해 보였다.
11월 10일 일요일
네티와 나는 바느질을 하러 교회에 갔다. 집에 돌아왔는데 찰리가 아파서 누워 있었다. 집 앞을 걷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집으로 옮겨져 몇 시간 동안 심하게 앓았다. 저녁이 되자 조금 나아졌다.
11월 11일 월요일
찰리는 한결 나아졌고 우리는 예정된 대로 결혼식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찰리와 고든 씨는 걸어서 그리고 고든 부인과 나는 버스를 타고 치안 판사 사무실로 갔다. 오후 3시, 찰스 페린과 릴리 로빈슨은 고든 씨 부부를 증인으로 치안 판사 앞에서 결혼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결혼 연회가 열리는 교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하객 60여 명이 있었다. 찰리는 참석한 모든 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베푼 친절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말하며 자신이 자메이카로 떠나기 바로 직전에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쓴 시를 낭독했다. 찰리와 나는 로슨 스트리트 6번지에 있는 우리만의 새집으로 갔다.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저녁
고든 씨 부부가 와서 우리는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함께 기도할 때 찰리는 희망과 기쁨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저와 제 아내”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실감한 엄숙한 시간이었다. 찰리는 예배가 끝나고 나서 한참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일기에 첨부되어 있던 신문 기사 : 비보(悲報)
자메이카 신문에 실린 다음의 슬픈 소식에 지역 사람들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95년 11월 20일,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찰스 페린이 생을 마감했다. 이 소식은 미망인인 릴리 로빈슨이 보내왔으며, 그녀는 몇 주 전 자메이카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소속 선교사로 봉사하며 페린 씨와 결혼하기 위해 시더 래피즈를 떠났다.
그녀는 11월 6일에 킹스턴에 도착했고 페린 씨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일요일 아침 페린 씨는 정신을 잃었고 곧 집으로 옮겨졌다. 월요일이 되자 그는 스스로 옷을 입을 만큼 호전되었고 둘은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식을 마친 후 페린 씨는 고열로 다시 드러누웠다. 현지 최고 의료진에게 모든 치료를 받았음에도 인간 능력에 한계를 느낀 페린 씨는 교회 장로들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모인 사람들은 페린 씨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또렷했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많은 동역자가 그의 죽음을 크게 애도했다. 페린은 가장 용감한 주님의 일꾼으로 기억될 것이다.”
11월 20일
오후 8시, 자메이카 킹스턴, 로슨 스트리트 6번지에서 찰스 페린이 내 곁을 떠났다.
11월 21일
오후 4시, 자메이카 킹스턴, 메이 펜버닝 그라운드에서 찰리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2월 25일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처음으로 맞아 본 초록빛 크리스마스였다. 사실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7월 4일 독립기념일처럼 느껴졌다. 안녕, 1895년, 안녕.
1895년을 보내며
1895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과 가장 슬펐던 시간이 공존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 1년 전 오늘밤, 나는 행복한 우리 집에서 부모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철없고 근심 걱정 없는 소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속에서 미망인이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님이 좋다.
1896년 1월 1일
1896년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혼자이다.
1월 14일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외로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찰리도 너무나 그립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그 시간을 갈망할 뿐이다. 내 사랑 찰리, 그 시간이 오면 당신은 여전히 나의 것이며 절대로 내게서 떠나가지 말아 주오. 내가 어디에 있든 위로를 얻도록 주님이 도와주시기를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이 땅에서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을 열심히 해낼 수 있기를 기도할 테니. 오, 앞으로 수많은 시간을 홀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 하지만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면 배고픔도 그 어떠한 것이라도 기꺼이 이겨 낼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명 도와주실 것이다.
1월 28일
몸이 아파 내내 집에 있었다.
1월 31일
오후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만족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내가 그분의 것이 되게 해 달라고 그리고 더욱 다른 이들을 도우며 그분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했다. 그랬더니 내 고향 몬태규를 떠난 이래로 가장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2월 5일
매우 넓고 좋은 집으로 이사했다. 각자 멋진 침실도 가질 수 있었다. 고든 씨가 내 방 한쪽에 3단 선반을 설치해 주었다. 그 선반에 엄마가 준 수건을 넣었다. 선반이 있는 쪽 벽에는 찰리의 사진을 걸어 놓았고 그가 찼던 시계도 선반에 놓았다. 그리고 플레처에게 결혼 선물로 받은 예쁜 꽃병도 함께 놓았다. 내 필통, 앨범, 바닷가에서 주운 예쁜 조개껍데기를 모아 놓은 상자, 독특한 나뭇잎들을 모아 놓은 상자도 놓았다.
2월 15일
이번 주는 내내 힘든 한 주였다. 정말이지 내 운명은 너무도 가혹한 것 같다. 사방이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찰리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그가 내 곁에서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 괴롭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하나님께 홀로 나아가서 그분께 내 괴로움을 토로하면 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비로우신 그분께서 친히 내 삶에 개입하셔서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나를 인도하셨고 최악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분의 은혜로 지탱할 수 있었다. 내 쓰라린 운명에 대해 하소연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내가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나를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고통으로 선을 이룰 수 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겸허한 마음으로 내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도와 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께 겸손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나를 버리지 말고 내 죄를 사해 달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분을 대적하여 죄를 범하지 않게 해 달라고 얼마나 간청했는지 모른다. 그러고 나서 다음 성경 말씀을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정말이지 나는 불의로부터 깨끗해지고 싶었다. 그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이 약속을 믿자 마음에 달콤한 평화가 가득 찼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내 죄를 사하셨고 사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다. 나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감사하여 저녁 내내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3월 20일
저녁 내내 몸이 아팠다. 찰리가 내 곁을 떠나 내가 홀로 된 지도 벌써 4개월이 지났다. 그날 밤 나는 집에 있으면서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찰리의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암흑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날의 고통을 다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에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놓아 주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울었다. 그랬더니 몸이 아파 왔다. 몸이 아파서 또 울었다.
4월 4일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 또 울었다.
8월
8월 내내 몸이 좋지 않았다. 해티와 킹스턴에 가서 2주 동안 스페인 타운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엄마가 아프다는 편지를 받았다. 엄마가 편찮으신데 볼 수도 없고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9월 21일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몸이 나아져서 프리몬트에서 열리는 전도회에 참석하신다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모스 부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 모스 부인의 집은 아주 크고 멋졌다.
9월 24일
오늘은 21번째 생일을 맞았다. 하루 종일 브라운스 타운의 더러운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아빠, 엄마, 형제자매,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찰리에게 편지를 썼던 지난해 생일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9월 28일
실바가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두 개나 받아왔다며 나를 깨웠다. 하나는 남동생 클라크에게서 온 편지였다. “너무도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야. 엄마가 돌아가셨어.”
9월 14일에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28일이 되어서야 소식을 들은 것이다. 엄마는 전도 집회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몸이 아팠다. 그러나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더욱더 알게 되었다.
11월 7일 안식일
1년 전 오늘은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다.
11월 11일
1년 전 오늘, 나는 찰스 페린과 결혼했다. 1년이 매우 길게 느껴졌으나 다행히도 예수께서 나를 보호해 주셨다. 오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뜨겁고 먼지투성이의 몬태규 베이 거리를 걸었더니 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외롭기까지 하다. 분명 1년 전과는 다른 변화이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였다. 우리의 미래에는 구름 한 점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꿈도 꾸지 못했다. 가장 행복한 신부가 9일 후 이 낯선 땅에서 홀로 미망인으로 남겨질지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1년 전에 나는 그저 소녀에 불과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맛본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여자로서 인생의 가장 쓴맛을 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더불어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지난 1년 동안 나를 위해 참 많은 일을 하셨다. 그분께서는 내게 그분께 의지하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그런데도 참으로 외로운 한 해였다.
지난 한 해 동안 내 앞에 펼쳐진 일을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나의 유일한 기도는 그 일들이 나를 깨끗게 하여 다가올 영원한 하늘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달라는 것이다. 내가 그분께 진실한 마음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를 바라며 그분과 함께할 영원한 집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11월 20일
1년 전 내 사랑 찰리가 죽었다. 아, 그가 너무나 보고 싶다. 1년 안에 내 사랑과 엄마를 한꺼번에 잃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 기쁘다. 그분이 언제나 함께 계실 것을 알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겠다고 그분이 약속하셨으니까.
릴리 그레이스는 그로부터 4년이 채 되지 않은 1900년 8월 3일, 아칸소 주 그래니스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1894년에 섬나라 자메이카에서 교인 37명으로 처음 조직된 교회가 이제는 교인이 25만 명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면 얼마나 놀라고 기뻐할까.
윌리엄 로빈슨
릴리 그레이스의 조카 손자이다. 워싱턴 야키마에서 부인 벨마진과 함께 살고 있다.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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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그레이스의 사촌 C. P. 볼만이 1900년 10월 16일 자 <애드벤트 리뷰 앤드 새버스 헤럴드>에 그녀의 사망 기사를 실었다. 후일 그는 이 잡지의 부편집인이 되었다. 교우 헤이즈머와 이스트먼은 병으로 쓰러진 찰리를 계속 돌보았다.
19 릴리 그레이스의 형제자매
릴리의 아버지
릴리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