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기
“이(아들)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라는 구절은 무슨 뜻인가?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설명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다. 히브리서에서 1장 1~3절은 서론에 해당하며 그리스도의 역할과 본질을 힘 있게 묘사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이다. 하나님은 그분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셨다(1, 2절). 첫 두 진술은 아들의 본질과 연관이 있다(“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리고 다음 두 진술은 그분의 역할을 다룬다(“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그분은 아버지 우편에 왕으로 앉으셨고 존귀하게 되신 분이다(3절). 나는 이 네 가지 진술 중 세 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 광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파우가스마’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구절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리스 문학에서 사용된 경우를 보면 그 말은 ‘빛, 광채’ 혹은 ‘반사’라는 두 가지 기본 의미가 있다. 분명히 어떤 번역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구절의 의미가 결정된다. ‘빛’으로 번역한다면 그 구절은 아들의 본질에 대한 내용이 된다. ‘반사’는 계시의 도구로서의 그분의 역할을 강조한다. 문맥에서 그 두 사상은 거의 분리될 수 없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가 되는 아들은 마지막 계시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그분은 본질상 영광의 광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분의 신비스러운 본질을 인간에게 나타내는 빛이다(출 24:16 참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그 광채는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다. 쉽게 말해 빛이 없는 영광은 없다. 개념상으로 구분할 뿐이다.
태양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빛과 태양을 분리할 수 없다. 이는 태양의 본질이 빛을 비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본질상 빛 중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게 된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분만이 영광의 광채를 보여 줄 수 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그분과 아버지의 불가분한 연합의 신비를 통해서이다.
2. 본체(후포스타시스)의 형상(차라크테르) : 이 구절은 앞 구절과 평행이며 앞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어 ‘차라크테르’는 이곳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리스 문학에서는 한 사람이나 물체의 독특한 특성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것은 한 물체에 새겨진 것(가령 도장 위에)이나 밀랍에 남은 한 물체의 자국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것은 본체(후포스타시스, 실체, 본질)와 연관되어 사용되며 하나님의 실체 혹은 존재에 나타난 독특한 특성을 언급한다. 예수께서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독특한 표를 지니고 계신다. 하나님만이 그것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정의해 주며, 결과적으로 그분께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수 있다. 예수와 아버지는 공히 독특한 본질을 지니신다. 이곳에서 본질과 역할은 분리될 수 없다.
3. 만물을 붙드시며(페레인, 유지하다, 지탱하다) : 이전 진술들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관련해서 아들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 진술은 세상, 즉 창조된 만물에 관련해서 아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붙들다, 이끌다, 세우다’와 같이 아주 많은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상은 2절에 나타나며, 거기서는 아들을 창조주로 규정한다. 이 경우에 주제는 창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동사는 현재 시제이고 창조는 과거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물을 인도하고 붙든다는 의미에서 세상을 유지하신다는 사상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아들은 피조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붙잡고 계시며, 그분이 의도하신 목적으로 세상을 이끄신다. 그분께서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3절) 이 일을 하신다. 세상을 존재하게 한 그 능력은 세상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 능력과 동일하다.
안헬 마누엘 로드리게스
대총회 성경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뒤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