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이야기
게토에서
북미 유대인 재림 선교 개척자
벤저민 베이커
1,800만 명이 넘는 전 세계 재림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재림 운동을 강력하게 인도하신 150년 역사를 기념할 때, 우리는 북미지회에서 온 한 영감적인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이야기는 불확실한 우리의 발걸음을 확실한 미래로 인도한다.
엄격한 가정 교육
프레데릭 칸즈 길버트는 1867년 9월 30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러시아인인 그의 부모는 신앙과 인종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러시아와 유럽 대륙을 떠나 이 나라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다.
길버트는 엄격한 유대인 가정 교육을 받았다. 랍비에게 훈련받았고, 유대교 입교 의식과 유대교 성인식인 바르 미츠바를 거쳤을 뿐 아니라, 경문을 이마와 왼팔에 차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는 기독교를 증오했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받은 교육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 보다 직접적으로는 그의 부모님이 기독교인에게 박해받았기 때문이다. 교회 앞을 지나갈 때면 역겨워서 침을 뱉었고 기독교인이 얼씬거리면 목을 조르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길버트는 격동적인 소년기를 보냈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한번은 벽난로에 넘어져 산 채로 화장을 당할 뻔했다. 십 대 초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명을 위협하는 천식과 폐질환 때문에 의사는 그에게 미국으로 건너가라고 제안했다. 항해가 그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도 있고 미국의 기후 또한 그의 건강에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길버트는 미국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를 쳤다. 그 나라는 불경하다고 아버지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배에 올랐다.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버트는 불행한 사고를 당했고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직행해야 했다.
미국에서
북미는 그야말로 악한 곳이라고 길버트는 생각했다. 공장에서는 독특한 유대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당했다. 노동 조합에 가입하고 회비를 납부했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해고당하여 전도유망한 일자리를 잃었다. 그 젊은 이민자는 직장을 찾아 떠돌아다녀야 했고 때로는 끼니를 때우지도 못한 채 얄팍한 옷을 입고 뉴욕의 밤거리를 걷기도 했다.
길버트는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21살에 보스턴으로 이사했고 재림교인인 피스크 부부의 집에 방을 얻었다. 그들은 좀 특이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제칠일을 거룩히 지켰지만 또 예수를 믿었다. 길버트는 곧 그들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유대교 신자로서 피스크 부부의 집에 들어간 그는 2년 뒤 열성적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되어 그곳을 떠났다.
1889년에 개종한 뒤 삶은 더욱 참혹해졌다. 일터와 길거리에서도 그리고 영국과 뉴잉글랜드에 있는 친척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어머니는 박해자의 신앙을 받아들인 아들을 배교자로 여기고 인연을 끊었다. 당시 신발 공장에 취직한 길버트는 문서전도자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그는 이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인근 사우스 랭커스터 아카데미(현 애틀랜타 유니언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동족을 위하여
대학 졸업 후 길버트는 10년 동안 뉴잉글랜드의 비유대인들(Goyim) 사이에서 사역하였다. 1896년 그는 엘라 그레이엄과 결혼하여 거의 반세기를 같이 살았다. 1898년에 그는 복음 사역자로 안수를 받게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재림교회는 특정 백성들에게 복음을 매력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조직을 재정비하고 토착화에 관심을 기울였고 길버트는 몇 년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미국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는 30만 유대인에게 다가가기 위해 철저한 캠페인을 벌였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직접 지역 사회를 찾아가는 실제적 전도법이었다. 그는 유대인 빈민촌에서 랍비와 대화를 나누고 가두 연단에서 유대어로 설교하고 다세대 공동 주택 사이를 돌아다니고 고아와 병자를 돌보고 실직자에게 일거리를 주선했다. 그리고 유대인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일요일 법령에 앞장서서 반대했다.
길버트는 아무런 지원책도 없이 가족과 친구로부터 버림받고 박해받는 유대인을 위해 보호소 설립했다. 또 <메시아에 관한 좋은 소식(The Good Tidings of the Messiah)>, <메신저(The Messenger)> 등 유대어 복음 잡지와 기타 소책자를 발간했고 회당과 강연장에서 연설하였다. 그 대가로 험악한 말을 듣고, 폭행을 당하고, 살인 협박도 받았다. 때때로 그의 머리는 피범벅이 되었고, 어떤 때는 온몸을 두들겨 맞고 통증으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메시아를 위해 겪는 기쁨으로 여겼다.
1907년, 길버트의 간청을 받아들여 뉴잉글랜드중앙합회는 유대인 부서를 신설했다. 길버트는 초대 부장이 되어 전략을 개발하고 보스턴과 다른 동부 연안의 도시들에서 현저하게 증가하는 유대인을 위해 자금을 모았다. 그는 또 애틀랜틱연합회 최초의 유대인 대표자로서 M. L. 앤드리어슨(스칸디나비아 대표), J. K. 험프리(흑인 대표)와 함께 인종 선교 전문가로 활약했다.
엘렌 화잇은 1908년에 길버트를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 “나의 형제여, 유대인들은 그대의 사역으로 도움을 받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백성들은 이와 같이 그들 앞에 제시된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께 굳센 용기를 가지라고 분부하는 바입니다. 당신의 사역에서 어떤 거대하고 놀라운 시작을 기다리지 말고 다만 기회가 올 때 잡으십시오. 진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들 앞에 수고하도록 주어진 기회들을 신실하게 활용할 때 비로소 입증될 것입니다.”
1913년에 북미 대외부는 길버트의 요청으로 유대인 부서 자문 위원회를 설립했고 길버트가 관리를 맡았다. 5년 후 그는 대총회 유대인 자문 위원회의 감독관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동족을 위해 사역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유대교와 재림교회 사이에 무수한 유사점을 보여 주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경험에서 얻는 실제적 교훈(Practical Lessons from the Experience of Israel)>, <성소 안의 메시아(Messiah in His Sanctuary)>, <유대교와 기독교(Judaism and Christianity)> 등 그가 지은 정교한 역작에서는 그리스도를 히브리 문화 의식의 정점이자 실현으로 제시하면서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22년부터 1946년 8월 31일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대총회 현장 근무자로 일했다.
그리스도의 방법들
북미지회는 지회 내 350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착안한 ‘6단계 전도 모델’을 시행해 왔다. 길버트의 생애와 사역에서 각 단계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선교 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가능한 한 구주께서 기초를 놓으신 방법들을 따라야만 한다고 느꼈다.”라고 회고하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보스턴 내 유대인 수만 명”과 그 너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보스턴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와 마을에서도 유대인이 찾아왔고 동족을 위해 시작한 사업에 대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집회에 참석한 어느 비재림교인의 확증은 오늘날에도 새길 만하다. 그는 길버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는 신약 성경 전체가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 같았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믿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벤저민 베이커
대총회 자료실 부부장이다. 본 기사는 <애드벤티스트 월드> 북미 웹사이트의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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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칸즈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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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대총회 현장 총무인 길버트(앞줄 가운데)가 1935년 경 남아시아지회 행정위원들과 포즈를 취했다.
위: 보스턴 선교: 길버트는 보스턴 거주 유대인을 위해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 사진은 1905년에 찍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