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뱀을 숭배한다?
상징이 실체를 가릴 때
아투아냐 치텀 뒤브루이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에 있는 작은 교회 몇 곳에서 예배 순서 중 하나로 뱀을 다루는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이렇게 위험한 행동에 참가하는 근거로 교인들은 마가복음 16장 18절과 바울이 독사를 만난 사도행전 28장 1~6절을 제시했다. 하나님과 그분의 보호하심에 대한 믿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데 매년 교인 중 몇몇은 뱀에게 물리고 종종 치명상을 입는다고 TV 진행자가 덧붙여 말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일까? 아니면 잘못된 믿음일까? 예배 순서에 뱀을 등장시키는 이들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열왕기하 18장에는 유다 왕 히스기야가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유다를 영적인 배교와 도덕적 타락으로 이끈 사악한 군주였고 우상을 숭배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유다의 주요 도시 여러 곳을 포위하고 점령하도록 허락하셨다.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여호와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왕하 18:3). 그는 백성을 구원하려면 우상 숭배의 풍조를 근절하고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벌였다. 산당을 제거하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렸다.
레위인에게는 우상 숭배를 위해 하나님의 집에 들여놓은 ‘모든 부정한 것’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라고 지시했다. 파괴해야 할 물건 가운데는 흥미로운 역사적 유물도 하나 있었다.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4절). 교회에서 뱀을 숭배하다니!
믿음과 실물교훈
놋뱀에 얽힌 이야기를 독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히스기야 당시보다 몇 세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그분의 선택받은 지도자 모세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돌아다녔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지만 때로는 아주 적은 양을 공급하거나 위협적인 장애물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이 시험에서 종종 실패했고 하나님과 지도자들을 향해 불만을 내뱉었다. 그에 대해 여호와께서 응징하셨다.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 21:6).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태를 파악했다. 그들은 모세를 향해 부르짖으면서 하나님께 중재해 달라고 간청했다. 변덕스런 백성을 불쌍히 여긴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모세에게 지시하셨다. 뱀에 물린 사람은 믿음을 발휘하여 죄의 상징인 놋뱀을 쳐다보면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수단을 의심한 사람은 죽음을 맞이했다.
놋뱀 자체에는 치유 능력이 없었다. 성전 봉사, 번제, 희생, 성일과 마찬가지로 뱀은 또 다른 실물교훈일 뿐이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구원의 계획을 드러내셨다.
뱀이 사람을 물고 사망케 하는 것처럼 최초의 뱀인 사탄도 인류의 첫 부모를 속이고 그들을 치명적인 죄의 독으로 물들게 했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운명을 그리스도께서는 방관하지 않으시고 장대 위의 뱀이 되셨다.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 예수께서는 독성 있는 우리의 본성을 당신의 순수하고 거룩한 품성과 바꾸셨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음으로 향하는 우리 운명을 그분께서 취하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그분의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믿음으로 구주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주시는 치유와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어떤 이들은 그 놋뱀을 행운의 부적이나 증표로 보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아니라 그 뱀에게서 치유, 축복, 부를 얻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징이 가리키는 실체보다 상징 자체를 높이고 신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감사를 표하기 위해 성전에서 그분을 향해 달콤한 향을 피웠던 그들이 이제는 그 놋뱀을 향해 향을 피웠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백성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뱀을 부수어야만 한다는 것을 히스기야는 알았다.
미묘한 ‘뱀 숭배’
예수께서 겸손한 교사로 이스라엘을 찾아왔을 당시 유대인들은 엄격하게 우상 숭배를 배격했지만 그 대신 새롭고 미묘한 형태의 ‘뱀 숭배’를 고안해 냈다. 그들은 전통과 관습 그리고 그들이 배운 “사람의 계명”(사 29:13)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켰다. 언제부터인가 유대인, 그중에서도 특히 바리새인들은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에 두지 않고 자기들이 물려받은 유업과 혈통, 철저한 율법(기록되고 구전된 것 모두) 준수, 장엄한 성전 등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규정 대다수를 예수는 별로 탓하시지 않았다. 대부분 본질적인 문제는 규정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것을 구원의 수단으로 의지하고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린(마 23:23) 사람들이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였고 거기에 거룩하게 하는 능력과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입술로만 하나님 존경했지 마음은 떨어져 있다고 지적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했지만 진실로 그분께 말하거나 그분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섬겼지만 율법이 의도한 것은 무시했다.
하늘을 보라! 그리고 치유를 경험하라!
어느 포근한 밤, 유대 관원인 니고데모는 사람들 몰래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다. 바리새인 동료들처럼 니고데모도 스스로 만든 ‘놋뱀’ 앞에 향을 피웠다.
성령의 역사를 설명한 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성한 상징물도, 오래된 전통도, 예언의 메시지나 거룩한 예언자도, 우리의 행위도 아니라고 예수는 말씀하였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엡 2:8, 9)
혹시 나만의 놋뱀에게 향을 피우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은 어떤 물건, 사람, 사상, 가르침, 전통과 관습, 태도, 관행, 심지어 사역과 활동일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신성해 보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우상처럼 우뚝 서서 하나님께 나아가 참예배를 드리는 길을 가로막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기(신 6:5, 6)보다 우리의 행동, 우리가 다니는 교회, 우리의 지식에 더 큰 가치를 두기가 쉽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부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물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드높인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고 참된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아투아냐 치텀 뒤브루이
미국 플로리다 주 웨슬리 채플에 살고 있다. 존 앤터니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발문 :
놋뱀 자체에는 치유 능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