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생활
신실한 종
진실한 삶의 모습
에르나와 존 시레가르
그의 이름은 살렘 하모낭간 판자이탄. 인도네시아 북부 수마트라 지역에 있는 시아발 아발 마을에서 태어난 바탁족이었다. 1900년대 초기에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바탁족을 찾아갔고 많은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젊은 시절
살렘은 초등 교육을 마쳤지만 고향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어느 날 그는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겨서 여행을 시작했고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일을 겪었다. 첫 목적지는 마을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북수마트라의 중심 도시 메단이었다. 긴 여정 동안 밤에는 몸을 맡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잠을 청했다.
메단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한 네덜란드 사람이 살렘에게 정원사 일을 제안하였다. 살렘은 그곳에서 꽃과 식물을 돌보고, 잔디를 깎고 뜰을 청소했다. 주인은 그에게 방과 급료를 주었다. 그것이 살렘이 받아 본 첫 봉급이었다.
살렘은 열심히 일했고 의무에 성실했다. 살렘이 충실한 일꾼일 뿐 아니라 총명하다는 사실을 주인은 눈여겨보았고 타이핑과 사무실 업무를 그에게 가르쳤다. 마침내 그는 도시에서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살렘에게 권했다. 살렘은 사무직 일자리를 얻었고 네덜란드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하기 위해 야간 수업에 등록하였다.
몇 달 후 살렘은 수마트라 서부의 중심 도시 파당에 있는 간호 학교에 다닐 기회를 얻었다. 아픈 사람을 돕는 간호사가 꿈이었던 그는 친구 카렐 탐부난과 파톰푸안 굴톰과 함께 간호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을 마친 후 셋은 간호사로서 일하게 되었고 새로운 일에 만족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재림교인 전도자가 마을에 찾아왔다. 세 젊은이는 미국에서 온 전도자가 성경 예언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지 호기심을 가지고 그 모임에 참석하였다. 처음에는 그 가르침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였고 재림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제 그들의 인생에 어떤 일이 펼쳐질까?
새 출발
세 사람은 새로운 신앙으로 기뻤고 새 교회 구성원으로 맡을 역할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에는 재림 기별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 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본토인 일꾼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1924년 교회는 카렐, 파톰푸안, 살렘을 싱가포르에 있는 말라얀 유니언 신학 대학원으로 보내 선교 훈련을 받게 했다. 졸업 후 그들은 자바에서 사역하도록 배정받았다.
살렘은 점차적으로 여러 도시, 다양한 영역에서 교회를 위해 일했다. 1925년에 그는 부목사가 되었고 담임 목사와 함께 세마랑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후 1927년에 살렘은 문서 전도 프로그램을 돕기 위해 북자바에 있는 수라바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에는 보르네오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살렘은 그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인 작은 강배를 타고 바리토와 카푸아스 강을 따라 내륙 지역을 여행하였다. 그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다약족은 식인종이었고 정령을 숭배했다. 강에는 악어들이 살고 있었고 지역 대부분이 야생 동물로 가득한 정글이었다.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지만 살렘은 복음이 미치지 못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께서 그분의 일을 지도하시리라 믿었다. 간호사이기도 한 그는 질병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다약족을 치료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다.
비위생적인 환경에 말라리아, 장티푸스 같은 질병이 가득한 내륙 지방의 혹독한 삶을 견디며 몇 주 동안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살렘의 아내 디나는 혼자서 아이들을 양육하느라 바빴다. 집이 강가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디나는 강에 떨어진 코코넛을 줍는 장치를 만들었다. 코코넛 과육을 깎아 요리에 사용하였고 오일을 짜서 부수입을 얻었다.
여행 중에는 남편과 연락할 수 없었지만 디나는 하나님께서 남편을 보호하시리라 믿었다. 살렘이 무사히 그리고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감사했다.
1929년에 교회는 살렘을 동자바에 있는 수라바야와 자바 서부의 반둥으로 보내어 문서 전도 사업을 관장하게 했다. 1938년에 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판자이탄 목사로 불리게 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40년에 자바 중부의 세마랑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1942년 일본 군대는 남으로 이동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했다.
전쟁은 세마랑 가까이까지 이르렀고, 네덜란드 정부는 사람들이 내륙으로 피난하는 동안 일본의 접근을 늦추기 위해 집과 건물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판자이탄은 먼저 그의 가족들을 도시 밖의 마을로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 밤이 되자 다시 도시로 돌아와 다른 교회 성도들을 구하였다. 그는 마지막 성도가 안전하게 피신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3년 반 동안 재림교회는 바깥 세상과 연락할 수 없었고 지회와도 연락이 두절되었다. 지역 목회자들이 교회 사무와 재정을 관리하였고 성도들을 돌보았다. 판자이탄은 계속해서 그의 성도들을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였다.
말년
전란의 여파로 판자이탄 목사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살이 많이 빠졌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지도자들은 판자이탄 목사를 자카르타에 있는 교회 본부로 불러들여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휴가를 보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또 그가 교인들을 쉽게 방문하도록 오토바이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판자이탄 목사는 말했다. “많은 교인이 누추한 곳에서 가진 것도 별로 없이 생활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오토바이를 타고 교인들을 방문하겠습니까?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전쟁 직후 판자이탄 목사는 중앙 자바의 모든 교회를 돌보도록 더 큰 지역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여전히 오토바이나 차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전거와 다른 대중 교통수단을 사용하여 교회와 성도를 계속 방문했다.
그러는 사이 판자이탄 목사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급기야 여러 달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병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50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판자이탄 목사가 도시 세마랑에서 얼마나 많은 친구를 사귀었는지 가족들은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장례 행렬은 거의 2킬로미터나 뻗어 있었다.
30년 후 그의 아내 디나도 세마랑에서 남편 곁에 묻혔다. 이후 두 사람의 무덤은 시아발 아발 마을의 작은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살렘과 디나 판자이탄에게는 그들을 따라 신앙을 이어받은 자녀와 손주가 있다. 또 그들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도 유산으로 남겼다. 살렘 목사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하늘 왕국을 위해 수많은 영혼을 구하는 흥미진진한 경험으로 가득한 삶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디나는 지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에르나와 존 시레가르
살렘과 디나 판자이탄의 딸과 사위이다.
캡션
개척자들 : 선교지로 향하기 전 동역자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살렘이고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디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