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곁에서 도와주자
챈들러 릴리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연습실 매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저녁 운동 수업 마지막 과제를 끝내기 위해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었다. 주먹 쥐고 팔 굽혀 펴기 50개를 더 해야 집에 간다.
그 수업을 들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데만 익숙하여 그날 밤 나는 학생 7명 중 꼴찌로 팔 굽혀 펴기를 마쳤다. 교실에서는 동료 학생을 존중하는 것이 에티켓이기 때문에 서로를 깍듯하게 대하고 급우들이 과제를 다 마칠 때까지는 아무도 먼저 교실을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팔 굽혀 펴기는 시간으로 계산하는 운동이 아니다. 마지막 50개를 끝내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나보다 어렸고 모두들 팔 굽혀 펴기를 마치고 부담 없이 몸을 풀거나 앉아서 쉬고 있었다. 가장 느리고 가장 나이 많은 나를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았다. 몸은 거부하지만 어려운 운동들을 끝까지 해내려는 결심 혹은 의지가 내게 있다는 것을 최근 알게 되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다른 근력 운동을 마치고 팔 굽혀 펴기 50회를 두 번 끝낸 뒤 다시 50회를 시작했다.
15번 하고 나서 힘이 들어 ‘푹’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다시 온 힘을 쏟아 8번을 더 했다. 그런 다음 5번. 마지막 세트를 끝내기 위해 칼로리가 전부 소모되고 있었다.
이어 6번 더 하고 났을 때 누군가 옆에 있는 게 느껴졌다. 땀에 흠뻑 젖어 역시 기진맥진한 그는 수업을 같이 받는 네이트였다. 그는 내 옆에서 몸을 낮추어 나와 높이를 맞추었다. 이미 자기 분량을 끝마쳤지만 동료를 도와주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좋아요, 챈들러.” 그는 장난기 있게 찡긋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한번 해 보자고요.”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베푼 뜻밖의 자비로운 행동으로 힘과 의지가 되살아났다. 10번 더 하고 다시 쓰러졌다. 내가 가슴을 들썩거리며 숨을 헐떡이는 동안 그는 잠자코 지켜보며 기다렸다. 동료가 옆에 있으니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팔 굽혀 펴기를 시작하여 마침내 50회를 마쳤다.
매트에 쓰러져 헐떡거리며 말했다. “고마워, 동생!”
동행
운동 수업 때 동료가 다가와 나를 격려해 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나는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다.
대학 마지막 해 봄 방학 때 집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근무하는 대총회의 동료, 친구, 이웃, 교인들로 집이 북적거렸다. 몇 시간이 지나자 미국에 거주하는 친지 여러분이 찾아와 도움을 주셨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개무량하다. 함께 슬퍼하면서 상실의 빈자리를 채워 준 그들의 사랑과 격려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건물(대총회)에서 일하는 분들에 관한 기억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더러는 지금도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낸다. 그 힘든 시기에 그들은 음식을 챙겨 주고, 집에 들르거나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메모지를 건넸다.
그런 역경을 누구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우리가 버텨 내는 데 힘이 된 것은 우리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이들의 격려였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기도하고 격려하며 일으켜 주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지만 신자로서 우리는 세상의 도움 그 이상을 받을 수 있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혹은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고 약속하셨고 행동으로 증명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고통과 슬픔의 시기에 예수께서는 함께 가슴 아파하신다. 베다니에서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과정 모두를 알고 계셨고 이미 그를 살릴 계획도 세우셨다.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으로 가족들이 슬퍼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같이 우셨다.
그분은 자신을 배신하거나 부인할 게 빤한 사람과도 끈기 있게 관계를 유지하셨다. 전염병 환자, 불구자, 심각한 질병을 앓는 자들과 용기 있게 만나셨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들을 참을성 있게 너그러이 용서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초연하게 십자가에 달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고통을 당하셨다. 자신의 몸에서 빠르게 생명력이 소모되고 고통으로 괴로운 순간에도, 박해하는 자들이 그분을 큰 소리로 모욕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옆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를 돕기 위해 다가가셨다. 모든 공포와 수치가 응집된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봐 달라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가? 상실이 무엇인지 예수께서는 몸소 경험하셨다. 배신당한 적이 있는가? 예수께서도 그 길을 걸으셨다. 불공평하게 대접받고 있는가? 그분이 당한 불공평한 처사를 전부 기록하면 책 한 권이 나올 정도이다. 육체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가?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나는 시련을 당할 때마다 예수께서도 고통을 겪으셨고 그것도 나를 불쌍히 여겨서 그렇게 되셨다는 사실 그리고 아직도 나를 불쌍히 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나와 눈높이를 맞추시고 굵은 피눈물을 흘리신다. 그분은 나의 곁에서, 나를 위해 고통 당하셨다.
내가 겪는 모든 고통을 그분은 이미 다 겪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내 곁에서 나를 도와 그것을 다시 헤쳐 나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힘들 때 옆에 계시는 주님, 고통과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우리가 다가가도록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곁에서 땀 흘리는 이들의 짐을 나눌 수 있는 축복을 이미 받았는지도 모른다.
챈들러 릴리
미국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에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대총회의 인적 자원부에서 수익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대총회 아침 예배 시간에 발표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