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척에서 수용까지
작은 섬이 위대한 증인으로 우뚝 서기까지
글렌 O. 필립스
2014년 1월 11일 안식일, 동부 카리브해에 위치한 430제곱킬로미터 면적의 작은 섬나라 바베이도스 전역에서 재림교인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브리지타운 근교에 있는 성 가필드 소버스 종합운동장에서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이다. 새로 선출된 동카리브합회장 R. 댄포스 프랜시스 목사는 ‘하나님은 준비되셨는데 당신은?’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였다. 섬나라 전역에 퍼져 있는 신자 수는 바베이도스 인구 15명당 1명이다. 57곳에 모여 예배드리는 1만 8,442명 이상의 신자는 재림교회를 이 나라의 주도적인 기독교 교파 중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바베이도스 재림 신자들은 이 나라에서 역동적인 복음 전도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수많은 교육 및 보건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초기의 반대
바베이도스에서 재림 신앙은 130여 년 전 선교 초기 이후 큰 진전을 보였다. 가까운 영국령 기아나(오늘날의 가이아나)에 살고 있는 언니가 애나 앨런에게 영문 <시조>를 보낸 것이 그 시작이다. 애나는 곧바로 그 소책자를 읽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이웃에게도 책자를 소개했고, 그중 몇 명 또한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다.
당시 그 섬에서 기반이 확고한 식민지 종교를 떠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때문에 선구자 제임스 R. 브레이스웨이트는 선교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정신 병원에 보내지기도 했다. 미국에서 침례 받은 카리브인 이민자 브레이스웨이트는 1880년대 후반에 새롭게 발견한 신앙과 함께 바베이도스로 돌아왔다. 그는 뉴잉글랜드 소책자협의회 대표였던 스티븐 A. 해스켈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람들을 모아 성경 읽기 모임을 열고, 그 섬에서 처음으로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모임을 조직하였다.
바베이도스는 매우 보수적인 영국령 식민지였다. 이곳의 주류 기독교 교단 성직자들은, 재림 신앙을 미국의 한 여선지자가 이끄는 ‘현대판 사이비 집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교인들이 재림교회 서적을 읽거나 그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금지 조치가 오히려 호기심을 촉발했다. 사회∙경제적, 민족적 배경이 다양한 1890년대 사람들은 재림교회 서적을 추가로 요청하였다. 미국에서 온 재림교회 문서전도자들은 유라이어 스미스의 <다니엘과 계시록>, 엘렌 .G. 화잇의 <부조와 선지자>를 무수히 배포하였다.
사역자가 도착하다
1890년 11월 20일, 덱스터 A. 볼은 바베이도스에 도착한 최초의 재림교회 사역자였다. 그는 처음에 브리지타운에서 주로 부유한 상인 계층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1년 뒤인 1891년에 17명의 침례자로 결실을 맺었다. 볼 목사는 외과 의사 한 명을 포함한 여자 11명과 남자 6명으로 그의 첫 번째 교회를 설립하였다. 건강 기별, 안식일의 준수 그리고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회 각계 각층의 바베이도스인을 이 신생 그룹에 연합하도록 이끈 재림교회의 주요 진리들이었다.
특별히 초기 수십 년 동안, 당대에 ‘유행하는 악습’으로 점철된 바베이도스의 사회적 관행은 재림교회의 가르침과 정반대인 것이 많았다. 안식일은 중요한 근무일이었으며, 부정한 음식, 주정 음료, 담배가 널리 소비되었다. 결과적으로 재림교인이 된다는 것은 실직, 외면,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수십 년에 걸쳐서 재림 신앙의 수용 분위기는 천천히 그리고 극적으로 변화되었고 바베이도스에서 재림 신앙 전파는 다음과 같이 뚜렷하게 다섯 단계를 거쳤다. (1) 초창기(1884~1901) (2) 재림교회 정체성 형성기(1902~1944) (3) 담대한 복음 전도기(1945~1965) (4) 수용기(1966~1991) (5) 성장과 신앙 보존기(1992~2014)
선각자들
미국에서 온 첫 종신 선교사는 엘람 밴 듀센과 그의 아내였다(1896). 그들은 1901년까지 머무르며, 첫 교회 건물을 세우고 교회 학교를 시작했으며 브리지타운 주변에 보건 진료소를 열었다. 교인 수는 30명에서 거의 100명으로 늘어났다. 회심자 중에는 교직에 종사하며 신분 상승을 지향하는 젊은이가 많았는데 재림교인이 된 연유로 강제 실직을 당하였다. 그중 세 사람은 국내외에서 재림교회 사업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찰스 J. B. 케이브는 존 하비 켈로그 박사의 아메리칸 메디컬 미셔너리 칼리지를 1907년에 졸업하고 바베이도스로 돌아와 30여 년 동안 요양원을 손수 운영하였다. 또 젊은 여성들을 훈련하여 간호사와 산파를 배출하고 저소득층을 위해 진료소를 운영했다. 그의 이름은 아직도 교회가 운영하는 두 기관인 케이브 메모리얼 클리닉과 요양소에 그대로 남아 있다.
윌버트 D. 포드와 램버트 W. 브라운은 그들의 작은 섬나라 밖에서 교회를 위해 일하며 발자취를 남겼다. 배틀크릭 대학에 다녔던 두 사람은 미국뿐 아니라 더 넓은 세상에서 선구적인 사역자들이 되었다. 브라운은 1906년 D. C. 배브콕과 함께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첫 교회를 설립하였다. 포드는 1910년에 시카고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그 후 40년 동안 미국 주변에 있는 교회들을 섬겼다. 당시 바베이도스에서는 초창기 재림교인들 사이에 기이한 사상이 나돌아 사역자들과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엘렌 화잇에게 편지까지 띄웠다. 교인들은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사람이 신발을 벗어야만 하며, 눈을 뜬 채 기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화잇 부인의 답장은 동정적이면서도 확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그러한 행위들을 옹호하도록 인도하지 않으신다.”
성장과 발전
재림교회의 성장과 발전의 중심은 브리지타운의 킹 스트리트에 위치한 모(母)교회였다. 이 교회는 기성 종교들로부터 계속적인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재림교회의 가치와 정체성에 대한 강한 인상을 끼치는 데 기여하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교회 10곳이 조직되었고 1,675명이 예배에 참석했다. 바베이도스 재림교인은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스스로도 이웃과 친척들에게 전도할 자격을 갖춘 특별한 무리라고 자부하였다.
전후 수년간은 지칠 줄 모르는 평신도 지도자 렌스포드 그리브스와 크리스토퍼 그리니지가 큰 공헌을 하였다. 교회와 예배소가 24곳, 신자 수가 3,000명이 넘을 무렵에 O. P. 레이드는 영혼 구원의 선봉으로 활약했다. B. G. O. 프렌치는 1953년 9월에 첫 중등 교회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그때 처음으로 재림교회의 교육 사업이 바베이도스 정부의 박수갈채를 받게 되었다. 1956년이 끝날 때까지 20년이 채 안 되어 신자 수는 세 배로 뛰어올랐다.
세계에 미친 영향
하나님께서는 한때 사이비 집단으로 멸시받던 작은 무리의 충성을 세상에 드높이셨다. 이곳에서 재림교회는 1990년대 이후로 매년 평균 7퍼센트 성장률을 보이며 숫자와 위상이 높아졌다. 교회의 충실한 일꾼들은 사회에 끼친 그들의 공헌으로 존경을 받았다. 바베이도스에 있는 퀸 엘리자베스 2세 병원에서 25년간(1957~1983) 수간호사로 일한 에나 K. 월터스, 바베이도스의 서인도 대학교에서 25년 이상(1979~2005) 공개 강좌 교수였던 브래들리 E. 닐스, 8년간(1994~2002) 바베이도스의 법제에서 지방 행정관을 역임한 에머슨 S. 그레이엄, 의회 의원이며 정부 각료이자 대사인 빅터 L. 존슨 각하가 그들이다.
세계 재림교회에 잘 알려진 바베이도스인으로는 복음전도자 켐블턴 위긴스, 교회 및 대학 행정가들로는 마이클 S. 밴필드, 칼라일 베인, 댄포스 프랜시스, 트레버 H. C. 베이커, K. 유진 포드, 실번 A. 래슐리가 있다. 섬사람 G. 랄프 톰슨은 유라이어 스미스를 제외하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대총회 총무로 교회를 섬긴 특별한 영예를 누리고 있다.
선교 130주년을 맞아 바베이도스 재림 신자들은 국가와 세계의 복을 위해 지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준비하고 있다.
글렌 O. 필립스
역사가이자 4대째 바베이도스 재림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