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인가 캐리커처인가?
창조주의 형상으로 디자인되었다
옌스 O. 모르
성경의 첫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 27).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은 인간과 사람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묘사한다. 이것은 다소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어떤 모양으로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동물 및 물질계의 나머지와 분리된다.
하나님의 첫 구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 개념에는 최소한 3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1. 인간은 하나님과 특정한 속성을 공유한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다. 우리는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독특한 개성, 자유 의지, 감정 등을 누린다.
2. 인간은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인간이 맡은 역할이 있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직무 대행으로 하나님을 대표함을 의미한다.
3.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지니고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께 속한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고귀함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표자로서뿐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파트너로 부름을 받았다.
죄의 파괴적인 힘
창조는 우리에게 동전의 한 면을 보여 준다. 그렇지만 타락 후에 인간은 하나님께 분리되었고 죄, 이기심, 자기 본위, 무정, 악에 대한 무기력 상태로 타락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타락의 정도는 더 심해졌다.
유대 전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 천사들과 상의하였다. 공의의 천사가 말했다.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동료 인간에게 온갖 악행을 범할 것입니다. 그는 완고하고 잔혹하고 부정직하고 불의할 것입니다.” 진리의 천사가 말했다. “그를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는 잘못을 범하고 형제 인간들을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속일 것입니다.” 거룩함의 천사가 말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일을 따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을 더럽힐 것입니다.”
천사들이 옳았다. 그들의 모든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인류가 일으킨 모든 불행, 슬픔, 파괴를 볼 때 이런 시각은 여전히 정당한가?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죄가 그 형상을 뒤틀어 놓지는 않았는가? 그 형상이란 단지 캐리커처에 불과한 것 아닌가?’
우리는 누구일까? 본질상 우리는 선하고 우리의 끔찍한 행위들은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는 일탈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본래부터 악해서 우리의 선행은 단지 우리의 본질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한 것일까?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질문과 씨름하였다. 종종 그들의 대답은 완전히 다르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는 창조 이야기를 빼면 구약 성경에서 창세기 5장 1, 3절과 9장 6절에 단 두 번 나온다. 두 경우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 형상은 왜곡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형상인가 캐리커처인가? 결국 우리는 이 긴장을 해결할 수 없다. 그 형상은 죄로 망가졌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서 그 형상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자 타락한 죄인 둘 다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이런 이중적 성향이 나타난다.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다
이런 이중적 성향을 극복하려고 역사에 걸쳐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인본주의에서는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악을 극복할 수도 있다고 제안하지만,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점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이 힘으로 빠져 나올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악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고칠 수 없다.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意志力)의 연단과 인간의 노력은 각각 상당한 분한(分限)을 가졌으나 이것들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한 것이다. 이것들이 혹 행위의 외모적 단정을 만들어 낼 수는 있을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動機)를 깨끗게 할 수도 없다”(정로, 18).
그렇지만 성경은 참된 변화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렇다.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자기의 형상을 새롭게 하고 싶어 하신다.
앞에 언급한 유대 전설은 계속된다. 거룩함의 천사에 뒤이어, 자비의 천사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그를 창조하십시오. 우리의 하늘 아버지시여. 그가 죄를 짓고 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벗어날 때, 저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고 사랑의 말을 하며 그를 아버지께로 돌아서게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팔을 활짝 펴셨다고 신약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만이 인간의 품성을 완전하게 할 수 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회복시킬 수 있다. 이 변화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안에서, 지금 이곳에서 시작된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9, 10절에서 이같이 말한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옛사람”은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이다. “새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새사람”이 더욱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단순히 새로 태어나는 순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표현은 “새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과정을 묘사하며 전 인격을 어루만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그분의 능력 안에서 신실한 생애를 살 수 있다. 마침내 우리가 새롭게 창조된 지구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즐길 때, 캐리커처는 결국 하나님의 회복된 형상이 될 것이다.
옌스 O. 모르
독일 슈투트가르트 중앙교회 담임 목사이며 클라우디아와 결혼했다.
사이드 바
인간의 본질
남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개성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부여받았다. 비록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각 사람은 육체, 정신, 혼의 불가분적인 통일체로서 생명과 호흡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의 시조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했으며, 하나님 아래에 있는 그들의 고귀한 지위에서 타락했다.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그들은 사망에 예속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이런 타락한 본성과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통회할 때 그들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간에 사랑하며 자신의 환경을 돌보도록 소명되었다(창 1:26~28; 2:7; 시 8:4~8; 행 17:24~28; 창 3장; 시 51:5; 롬 5:12~17; 고후 5:19, 20; 시 51:10; 요일 4:7, 8, 11, 20; 창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