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된 은혜
성만찬 예식에 관한 고찰
에블린 세일러
“여기 남은 포도즙은 밖으로 가지고 나가 땅에 쏟아 버리고, 남은 떡은 집에 가져가 태워 주세요.” 교회에서 성만찬 예식이 끝나고 정리를 마친 후 수석집사님이 부탁하셨다.
집사로서 봉사할 특권을 얻은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것이 의례적인 절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도즙을 가지고 교회 뒷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땅에 포도즙을 쏟으며 마음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때때로 ‘왜’라는 질문은 위험할 수 있고 의심과 반항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는 진정한 바람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의구심은 더 깊은 경험과 큰 은혜를 이끌 수도 있다.
성만찬 예식 후 남은 떡과 포도즙을 폐기하는 이유는 예식에 사용한 떡과 포도즙을 일상의 음식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생각 때문이다. 이 설명에 이의는 없다. 그러나 나는 틀림없이 더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 느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음식에 축복하시고 5천 명을 먹이셨다. 이후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 6:12)고 당부하셨다. 나는 ‘낭비가 없으면 부족이 없다.’는 삶의 원칙을 배우며 자랐다. 따라서 좋은 음식을 버리는 것은 나의 천성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성만찬 예식을 준비하기 위해 이른 아침 포도즙을 작은 컵에 채우고 성찬기에 떡 차리는 것을 도왔다. 예상 인원만큼 충분히 준비했는지 확인하고 만약을 위해 여분을 넉넉히 준비했다. 성만찬 예식 도중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즙이 모자라 당황하는 일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성만찬 예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 예식에 환대 이상으로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더 깊은 의미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모두에게뿐 아니라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이에게 넉넉해야 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히 2:9)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회개하는 모든 죄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고 보증하셨다.
엘렌 화잇은 이 보증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잃어버린 세상을 위한 속죄는 충분하고 풍성하고 완전하여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영혼에게 미치기에 풍족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큰 선물이신 분을 받아들일 사람의 수효를 초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제한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구속의 경륜의 관유(寬裕)함이 준비한 모든 것을 성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속의 경륜이 헛된 것은 아니다. 구속의 경륜은 여유가 있어야 한다”(소망, 565, 566). 화잇은 또한 “공의는 인간의 고통을 요구하였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는 대신 당신의 고난을 대가로 주었다.”라고 기록한다(리뷰, 1886. 9. 21.).
그러나 낭비의 문제에 대해 만족스러운 답을 아직 얻지 못하였다.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의문이 생겼다. 만약 포도즙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상징한다면 왜 남은 포도즙을 땅에 쏟아부어야 하는가?
갑자기 나의 마음에 그 진리가 분명해졌다. 낭비의 위대함을 진정 깨달았다. 낭비되는 것은 상징에 불과한 포도즙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우리를 위한 그분의 죽음이 곧 진정한 낭비였다! 포도즙 한 잔과 떡 한 조각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면, 남겨진 포도즙은 거저 주어진 복을 받아들이지 않은 누군가를 의미한다. 선택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희생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편에서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헤픈 낭비인가! 이런 손실이 얼마나 구주의 상처를 쓰라리게 할 것인가!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적은 무리가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일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적은 무리를 구원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준비하지 않으셨다. 받아들이든지 않든지 희생은 모든 잃어버린 죄인을 구원하기에 충분해야 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그들의 죄를 덮기에 충분치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는 죄인은 아무도 없었다. 구원의 위대한 계획에서 한 사람이라도 제외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결코 아니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깨달음을 위한 몸부림
우리의 이기적인 인간 본성으로는 풍성히 용솟음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어렵다.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와 발에 향기로운 값진 향유를 부으며 자신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였을 때 유다는 화를 내며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요 12:5, 새번역)라고 항의하였다. 유다의 탐욕스런 본성으로는 마리아의 아낌없는 선물이 심각하게 헤픈 낭비로 보였던 것이다.
사탄은 예수를 단념시키기 위해 그 희생이 헛수고라고 속삭였다. 희생의 가치를 알아보고 감사할 사람이 거의 없으니 예수의 피는 땅에 버려져 낭비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허비된 선물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이 주시는 확증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사 53:11)는 확증이었다.
사도 바울 또한 예비된 선물의 위대함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라고 기록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폐하거나 “저버리”(한글킹제임스)게 되는 두 길이 있다. 사도 바울이 설명했듯이 하나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고 계속 죄를 짓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이 부류의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왕은 큰 비용을 들여 혼인 잔치를 예비하고 와서 함께 축하하자고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 버렸다(마 22:5). 포도즙이 땅에 쏟아부어짐으로 헛되이 낭비되었듯이 두 부류의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허사가 되고 만 것이었다.
세상일에 여념이 없어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지 않거나 예수의 고난 즉 우리의 죄를 위해 값없이 주어진 성만찬 포도즙이 땅에 쏟아져 낭비되는 일이 없게 하자.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시라”(마 26:27, 현대어성경).
에블린 세일러
원예와 자연을 사랑하는 주부이며 <그림으로 보는 창조(Creation Illustrated)>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