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고난과 그의 친구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라엘 시저
“욥의 자녀 10명이 큰아들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잔치에 갔다가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다.”1
“욥기에 나타나는 우주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대쟁투를 강력하게 입증하고 있다.”2
위의 두 진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탠의 이야기를 우선 들어 보자.
스탠의 이야기
스탠은 특이했다. 뜨거운 물만 마셨고 개를 부정한 동물이라고 몹시 싫어했다(계 22:15 참조). 아버지와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아버지는 두개골과 왼손에 이식 수술을 받고 한 달간 병원에 입원했다. 스탠은 우리 죄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단언했다. 내가 무사했던 건 불쌍한 아버지보다 내가 더 의로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삶에서 겪는 고통이 죄의 대가라고 보았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도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욥 4:7, 표준새번역)라고 반문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목숨을 잃은 1,836명은 악해서 죽은 것이고, 미국에서도 특히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를 강타한 폭풍우는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다.3 또 2014년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나이지리아에 발생한 에볼라 출혈열은 그곳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이 원인이다. 엘리바스도 말을 거든다.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8절). 자업자득이다. 독을 뿌리면 독을 거두게 된다. 선지자 호세아도 바람을 심으면 광풍을 거둔다고 하지 않았는가(호 8:7). 자동차 사고도 같은 맥락이다. 아버지는 죄 때문에 두개골이 손상된 반면 아들은 착실했기 때문에 무사한 셈이다. 스탠 그리고 욥의 부유하고 유명하고 건강한 친구들의 논리를 종합해 보면, 넘어지고 정강이가 부러진 이유는 죄인의 죄 때문이다.
스탠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스탠의 신념과 엘리바스의 신학으로 보면 아기에 젖을 물리는 어머니와 세계 곳곳의 구호 사업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삶에서 당하는 고통이 자기 죄의 대가라면, 배고파 우는 아기의 고통을 없애려고 어머니가 개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진으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구조대원이 피해자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왜 그렇게 고군분투하는가?
덮어 두면 안 될 것 같은 신학적 문제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논리적, 윤리적, 지적 능력을 다 짜내어 본다. 빌닷은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잘못 판단하실 것 같은가? 전능자께서 실수라도 하실 것 같은가? 자네 자녀들이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하네. 그래서 그 죗값을 받은 걸세”(욥 8:3, 4, 쉬운성경). 대체 욥의 아들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길래 죽음으로 그 “죗값”을 치렀단 말인가? 그리고 나이가 적은 막내가 맏아들과 같은 시각에 목숨을 잃었다면 막내의 죄질이 그만큼 더 나빴다고 계산해야 하는 걸까? 자식 열 명이 한 순간에 죽어 버리면 누가 가장 괴로울까? 목숨을 잃은 당사자일까 아니면 슬픔에 빠진 부모일까? 욥기서 1장의 비극을 욥에게 가하는 형벌로 본다면 그의 아내에 대해서 친구들은 어떤 신학적 논리를 펼 것인가?
스탠과 이단적 진리
욥기 11장 6절에서 친구 욥을 향한 소발의 확신에 찬 대답은 앞선 두 친구의 신학보다 한술 더 뜬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네의 죄를 얼마쯤 제하시고 벌을 내리신 것 같아”(쉬운성경). 한 토막 진리를 갖다 붙인 결과 속임수가 그럴싸해졌다. “그분은 우리의 죗값을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는 시편 103편 10절(쉬운성경)이 이런 데 적용되는 말일까? 한 조각 진리를 절묘하게 접목하여 의미가 혼란스러워졌다.
소발의 기발한 적용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람의 운명을 지옥행으로 결정지어 놓는 그 유명한 예정론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로마서 9장의 말마따나 분명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하시지 않는가! 버림받은 존재가 영원한 진노의 불꽃으로 떨어진다는 관념 역시 소발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버려진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의 고통을 당한다고 했다. 나눠 주면 번영할 것이라는 억지스런 탐욕도 소발의 사고방식대로라면 가능하다.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스탠의 오해
스탠은 죄를 측정할 수 있고 그 대가로 무슨 일을 당할지 판정할 수 있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거짓이다. 물론 삶에는 결과가 존재한다. 잎사귀가 떨어지고 꽃이 시들고, 물이 오염되며 오존층이 파괴되듯, 죄 역시 정해진 대가(롬 6:23)가 있다. 그리고 “사악한 자의 길은 험”난하다(잠 13:15).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를 예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다. 누가 죄를 지었는가? 말레이시아항공 MH17 여객기 승객들인가? 그래서 격추당한 것인가?4 비탄에 잠긴 유족들이 죄인인가? 천장을 뚫고 안방으로 떨어진 시신들을 목격하며 결코 회복하지 못할 충격과 공포에 빠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주민들인가? 누가 죄를 지었는가?(요 9:1, 2 참조).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죄로 인해 이 땅의 모든 불화와 혼란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다(롬 5:12). 그러나 우리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반문은 우리의 생각이 음흉함을 드러내신다. “너희는 이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사람(여객기 이용자)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 13:2). 희귀 질병에 걸린 이유는 자신이나 부모가 무절제했기 때문일까?
하나님이 인간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시고 왕들을 폐하시고 세우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분의 이상에 들어맞기 때문만은 아니다. 때때로 그분께서는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기도 하신다(단 4:17). 또 그들이 군사적, 법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한다 해도 예레미야의 말처럼 그들 스스로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다(렘 10:23). 마음의 부패함을 모르며(렘 17:8),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에서 낼 능력도 없다(욥 14:4). 따라서 날씨, 선거, 체육 행사 또는 암 극복 등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판가름할 수 없다. 우주에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준 반역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서 시작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창조력의 현현 하나하나마다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에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완전한 축복이 포함되어 있다”(부조, 33). 그리고 그 어떤 피조물도 태어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 위해 값을 치르지 않는다.
스탠의, 우리의 그리고 사탄의 어리석음
스탠이 죄의 경중을 무게로 잴 수 있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 죄의 무게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무게가 상응한다고 잘못 믿고 있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그런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점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죄는 불법이다(요일 3:4). 죄는 저주 아래 있는 이 땅의 모든 균형을 파괴했다. 성실하게 건강 생활을 유지했다고 해서 음주 운전자가 그 사람만 피해 가지는 않는다. 새로 출현하는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일 수 있다.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왜 저입니까!”라고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그분의 유일한 답변은 십자가에 달린 자기 아들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죄가 완전히 망쳐 놓았지만 죄가 생기기도 전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분은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해결책, 유일한 해결책을 마련해 놓으셨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죄 없는 아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죄로 인한 파멸의 값을 다 지불하시고 황폐한 이 땅을 처음 상태로 완전히 회복하실 것이다(벧전 1:18~20).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고후 5:21). 그 십자가만이 죄와 고통의 관계를 제대로 지적해 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죄의 대가를 완전히 치를 수 있다(롬 6:23).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희생, 그분의 십자가는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구속받는 자들의 과학과 노래가 될 것이다”(행적, 273). 또 십자가만이 우리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준다. “십자가의 빛을 통해서만이 인간 영혼의 참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상동).
하나님을 중상모략 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는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스라엘의 정복 활동, 불못을 예로 들며 다른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비열하고 복수심 강한 분으로 소개했다. 인간도 그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은 성육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며 사탄의 비방을 묵살했다. 비열한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임을 그들은 확인했다. “그가 세상의 구주께 자행한 잔인한 공격만큼 천사들과 충성된 온 우주 거민들의 애정을 사탄에게서 효과적으로 근절시킨 것은 없을 것이다”(쟁투 501). 천사들이 깨달은 것을 우리도 깨닫게 되었다. 사탄은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탄은 형벌을 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셔서 우리가 나음을 입게 하셨다(사 53:5).
스탠의 도전
스탠과 욥의 친구들은 고통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내쫓고, 도성과 나라(자기 백성 이스라엘까지도), 심지어는 온 세상을 멸하시고 같은 일을 또 반복하신다고 했다.5 그러나 이것은 그저 사탄이 들고 있는 무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일 뿐이다. 그분의 아들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으며(히 5:8),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들을 여전히 징계하신다(잠 3:12; 히 12:6). 그러나 고통은 훈육을 위한 필수 도구가 아니다. 고통이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아니듯, 진화는 한 번도 하나님의 방법이 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광신자들은 이단자를 색출하여 박해하거나 참형, 화형으로 고통을 초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시작하신 분이 아니요 그런 일들을 가능한 빨리 사라지게 하실 분이다.
사랑이 동기가 된 부모의 훈육과 “의의 평강한 열매”(히 12:11)를 맺는 일은 잔인한 범죄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훈계를 사탄의 고문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6 그분은 남들의 재난을 통해서도 우리가 반성하고 돌이킬 기회를 얻도록 가르치신다(눅 13:1~5).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경험하는 상당수의 고통은 그들의 대적이자 하나님의 대적인 악의 세력이 직접 가하는 공격이다.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사자 굴과 맹렬히 타오르는 용광로 그리고 여러 시련은 전부 악에 받친 사탄의 작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그의 증오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의 사랑이 사탄을 이겼다. 앞으로도 승리할 것이다.
바른 이해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비극적인 형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된다(요 10:10).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이며, 예수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질투를 품고 있다. 하나님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분이므로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유일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전술은 아버지와 아들을 음해하는 것이다.
대쟁투에서 하나님은 사탄의 모략에 맞먹는 말솜씨로 그를 이긴 것이 아니다. 그분은 놀라운 방식으로 비방꾼의 모든 비방이 거짓임을 드러내시고 승리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분의 자비는 소발이 생각한 자비와 차원이 다르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얼마쯤’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며 우리의 죄를 모두 잊으신다. 그분께서는 형벌의 대가를 완전히 치르실 때까지 채찍의 고통을 참으셨다. 이제 더 이상 치러야 할 대가는 없다. 대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순결함을 주셨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사탄은 우리를 뒤흔들고 있다.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사탄의 무자비함보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백만의 어리석은 영혼을 현혹하는 고행, 연옥, 참회 순례, 물품 구입 등에서 구원을 찾지 말라. 이런 행동은 소발의 생각과 일치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죄라고 선언해 줄 성직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높이 들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딤전 2:5)이신 그분께서 회개의 마음을 주시고 죄를 용서하신다(행 5: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찾았다고 해서 죄악 세상의 혼란이 그치거나 세상이 질서에 따르지는 않는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선물이요 기적이며,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그분께서는 세상을 이기셨다(요 14:27; 16:33).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의 생각도 이기신다. 사탄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손해를 끼칠까 개의치 말고 이 말씀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분께서 부르셨고 우리는 응했다. 그분께서 영생을 주셨고 아무도 이것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요 10:28, 29).
한편 우리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제국이 오기를 기도하며 살아간다. 그날이 오면 죄와 사탄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한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린다(사 25:8; 고전 15:54).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1 John C. Holbert, Preaching Job(St. Louis: Chalice Press, 1999), p. 40. Holbert is paraphrasing—not affirming—Bildad’s sentiments.
2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2nd ed.(Silver Spring, Md.: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 2005), p. 116
3 www.chron.com/news/hurricanes/article/Some-say-natural-catastrophe-was-divine-judgment-1938772.php. 앨런 쿠퍼먼은 2005년 9월 4일 자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낙태 천국, 뉴올리언스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뉴올리언스의 버번 거리와 프렌치 쿼터에서 열린 동성애자 축제를 불쾌하게 여기셨다.”라고 언급했다.
4 MH17 여객기 탑승객 298명 중 3분의 2가 네덜란드인이었다.
5 창세기 3장 2~24절; 6~8장; 18, 19장; 고린도후서 36장 15~21절; 말라기 4장 1~3절; 요한계시록 20장 9~15절 참조
6 “사탄은 자기의 특성을 인류의 창조주시며 은인이신 하나님께 돌린다. 잔인성은 사탄의 본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쟁투, 534).
라엘 시저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 사랑의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