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가?
존 M. 파울러
성탄절이 좋든 싫든 그 시즌이 되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다. 연말은 어느 때보다 시끄럽고 분주하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지만 그때가 가장 외로운 이들도 있다. 심혈을 기울여 선물을 고르고 포장하여 발송하고, 다음 날에는 다시 반품하면서 정신없이 지내다가 하나님께 귀 기울일 시간을 잃어버린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팍팍한 경제 사정과 인사치레 속에서도 우리는 더 의미 있고 풍요로운 일을 할 수 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설교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말씀을 완벽히 이해했다(히 1:1~3). 옛적에 하나님께서는 기막히고 놀라운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첫 번째는 멋진 창조 이야기이다. 그분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이 그 이야기의 절정이다. 그분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우레처럼 선포하셨고 꿈과 이상으로 나타나셨다. 또 어떤 이들과 오찬을 나누셨고, 맹수 밥이 될 뻔했던 이들을 구하셨다. 분명한 도덕적 삶의 나침반을 제시하시면서 시내 산을 뒤흔드셨고, 폭풍 속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속삭이기도 하셨다. 후세대를 위해 자신의 말을 기록하게 하셨고 또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시 119:105)이 되도록 그 말씀을 조심스럽게 보존하셨다. 그중 절정은 베들레헴에서 전하신 말씀이다. 그분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로 한 것이다(히 1:1, 2).
그날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눅 1:30; 마 1:20; 눅 2:10). 가장 먼저는 두려움에 휩싸인 젊은 여인 마리아에게, 이어 당황한 요셉에게 그리고 비천한 양치기들에게 주어졌던 이 기별은 시대를 넘어 전해져 내려오면서 모든 사람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두려움이란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타락한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비극적 감정 중 하나이다(창 3:10). 성경에서 하나님이 가장 자주 명하신 것이 바로 “두려워 말라”이다. 650회 이상이나 말씀하셨다.
구주의 강림은 두려움 없는 삶을 약속한다.
복음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 믿음이 공격받을 때, 사명과 사역에 의구심이 들 때, 자신이 가치 없다고 느낄 때, 질병과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 앞날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보증은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그분은 모든 두려움을 정복하셨다. 어떤 두려움이 엄습해도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아들을 통해 모든 병기를 마련해 놓으셨다. 아들의 능력과 임재를 통해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듣는다(마 1:20; 28:5; 17:5~7; 28:10; 10:28~31; 눅 8:50; 요 14:1~3).
둘째, 우리에게 임마누엘, 즉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생겼다고 말씀하셨다(마 1:23). 물론 하나님께서는 베들레헴 이전과 이후에도 우리와 항상 함께 계셨다. 모든 시대를 통해 그분의 영원한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와 힘의 풍성한 원천이 되어 왔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역사는 전환점을 맞았다. 우리에게 새롭고 역동적인 하나님의 실재가 나타났는데 곧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다(사 7:14).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의 형체를 취하시고 “임마누엘”이 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베들레헴에서 두 가지 큰 신비가 나타난다. 첫째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하신 예수 탄생의 신비이다(눅 1:31). 예수께서는 역사 속에,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 속에 태어나셨지만 그 탄생은 역사를 초월하며 역사를 논박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지성과 과학의 입장에서는 보통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자연에 역행하는 일이므로 과학이나 철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마리아 역시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고 물었다. 천사는 그녀에게 이 일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고 보증해 주었다(37절). 마리아는 놀랍게도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즉시 믿음으로 복종하였다(38절). 아무리 논리적이고 당연한 질문이라도 하나님께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영원한 진리 앞에서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창조, 십자가, 성육신, 부활, 만나, 오순절의 성령 강림, 그 무엇이 되었든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에 대해 말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논쟁도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다.
베들레헴의 첫 번째 불가사의가 예수 탄생이라면, 그분이 탄생하신 이유는 두 번째 불가사의다. 오래전 구유에서 탄생하신 아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 곧 “절대 끊어지지 않는 줄로 자신을 인간에게 붙들어 매신”(소망, 25) 분이시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신’(딤전 2:6) 분이시다. 아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완전한 계시이다. 그 아들은 우리에게 맏형이 되셨고 죄에서 구원받아 영생으로 가는 통로가 되셨다(요 3:16). 성육신의 신분 속에서 아들 하나님이 성취하신 것은 죄의 파멸에서 회복되는 것 이상이다.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영원한 분리를 초래한 사탄의 계획을 무너뜨리셨다. 아들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시다. 하나님이 지금뿐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고한 보증이시다.
셋째,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주라고 말씀하셨다(마 1:21; 눅 1:31).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지역을 넘어서고 모든 인류가 그 죄와 사망의 비극에 참여한 이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부르짖음이 어디서나 울려 퍼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 베들레헴으로부터 메아리쳐 오는 대답은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이다. 또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베들레헴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셨다고 힘주어 말한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성탄절에 담긴 구속의 의미를 온갖 소란스러운 축제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탄절을 통해 죄를 분명하게 깨닫는다. 죄는 현실이며 그 대가는 값비싸다. 죄의 장악력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치명적이어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의 용서와 죄책과 그 지배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스도는 성탄절의 핵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죄에 관한 이 진리는 반복해서 전해져야 한다. 힌두교 철학자 비베카난다는 “인간을 죄인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죄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속적인 모욕이다.”1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삶을 소유라는 관점에서 보는 물질주의자를 비롯하여 인생을 자아 성취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철학적 인도주의자까지 말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아기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 아기를 통하여 우리는 깃저고리에 싸여 있는 우주의 창조주,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마 26:28) 아득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자기의 피를 쏟으시려는 분의 모습을 발견한다.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탄을 멸하고 구원을 개시하려는 거룩한 사명을 구유에서 시작하셨다. 그래서 구유의 아기를 세상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황금만능주의의 시장판에 빠져든 때에라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1 Swami Vivekanan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