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의 증인
데니스 카이저
엘렌 화잇(1827~1915)과 그녀의 저술을 알게 된 것은 십 대 초반, 내가 공산주의 동독에서 드문드문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할 때였던 것 같다. 몇 사람은 선지자로서 그녀의 사역에 대해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고 어떤 이들은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1을 신랄하게 비난하게 위해 그녀의 저술을 이용하였다. 어쩌면 사람들을 가리키며 비난하기 좋아하는 늙은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린 나의 경험에 공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엘렌 화잇 자신은 하나님의 책망이 담긴 메시지를 전할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용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 그녀의 저술이 나 자신을 위한 기별임을 발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녀가 기록한 내용 대부분은 견책이나 책망이 아니라 성경을 더욱 잘 이해하고 예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선악 간의 쟁투를 이해하고 이 땅에서 건강하고 보람 있게 살고 새 땅 고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교회증언> 1~9권 역시 단지 특별한 상황에서 특정 문제를 지닌 인물이나 교회를 훈계하는 내용뿐 아니라 전기적 자료와 유익한 충고들이 담겨 있다. 그나마 이 책에 나오는 견책도 한마디로 ‘배우자와 동료 신자,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실 우리는 견책과 책망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경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빈번히 핍박받고 심지어 순교까지 당한 이유를 기억해 보라(눅 11:46~51; 행 7:52; 롬 11:3). 그러나 메시지 때문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분의 도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선지자 사역의 본질과 목적
성경 속 선지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엘렌 화잇의 생애와 인격에 더욱 친숙해질수록, 나는 그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실수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과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력에 자신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고 천둥 같은 경고의 기별을 외쳤을 뿐 아니라 능력과 이적과 영광을 드러낸 하나님의 행동을 백성에게 상기시키기도 했다.
또 하나님의 과거 말씀과 가르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그분의 백성들이 이미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도록 했다(사 8:20 참조). 그들이 열거한 승리와 실패를 통해 영적 승리는 하나님과의 밀접하고 살아 있는 관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일깨웠고 하나님과 더욱 밀접하고 신실한 관계를 맺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된 대속물이자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메시아로 소개했다.
상호 간의 사랑
그런 호소는 청중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자유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로봇에 불과하여 사랑할 수도, 만족과 성취를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택의 자유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거룩한 은혜를 통해서만 그분과 백성 사이의 상호적인 사랑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궁극적 근원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요일 4:7, 8). 성경의 선지자들은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빈번하게 선포했다(사 54:10; 63:7; 렘 31:3; 애 3:22; 단 9:4; 미 7:20). 희생 제물과 헌물만 드리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그분을 사랑하라고 호소하였다(호 6:6; 10:12; 12:6; 미 6:8; 슥 7:9). 강요된 굴종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품성에 반할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사랑을 나타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돌이키고 구원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신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위대하고 풍성하게 표현한 것이다(요 3:16). 선지자들은 그분의 품성과 목적,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별을 보여 주는 도구였다. 때로 그 내용이 가혹할지라도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에게서 그것이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격렬한 분노조차도 그분의 거룩한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의 영원한 안녕과 운명에 대해 관심이 많다(사 54:8; 렘 32:18; 애 3:32; 욜 2:13; 미 7:18).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아내 사랑하는 남편(렘 3:20; 11:15; 31:31; 호 2:19), 자녀 사랑하는 아버지(사 63:16; 렘 3:19)에 비유하면서, 긴밀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관계를 자주 묘사하였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보낸 경고와 견책의 기별들은 사실 사랑하는 남편, 애정 넘치는 부모에게서 온 편지이다. 그분은 우리가 멸망당하게 놔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데려와 구원하시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하시며 “사랑의 줄”(호 11:4)로 우리를 당기신다.
예수와 성경을 향한 열정
엘렌 화잇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사람들을 자기에게 이끌지 않고 성경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사역 초기에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 말씀을 믿음과 행동의 규범으로 추천합니다.”3 생애 말미에는 성경을 높이 들고 1909년 대총회 대표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4 그녀의 저술은 성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특정 상황에 성경의 원칙을 적용한다.
또 그녀의 저술에 나타난 또 다른 핵심 기별에 나는 감동받았다. 바로 “비할 데 없이 깊고” “견줄 수 없이 매력적인” 우리 구주의 사랑이다.5 그녀가 저술한 <정로의 계단> 제1장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연과 계시는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한다.”6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녀의 영적·문학적 최고의 걸작인 대쟁투 총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7라는 말로 시작하고 이 말로 끝맺는다. 이 시리즈의 중심 저서 <시대의 소망>은 하나님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 모든 소망과 희망과 기대가 되시는 우리의 구주와 친구를 보여 준다.
성경과 사랑의 주님을 향한 열정은 성경 속 선지자들의 글에서뿐 아니라 엘렌 화잇의 저술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녀의 저술 덕분에 나는 예수님과 더욱 가까워졌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튼 나를 사랑하고 염려해 준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권면과 책망이라면 받아들이기도 더 쉽다.
데니스 카이저
독일 출신이며 앤드루스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재림교회 연구 및 역사신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1. 조너선 에드워드의 유명한 설교 제목에서 인용한 것이다. 참고 (Boston: Kneeland and Green, 1741)
2. <엘렌 G. 화잇 자서전>, 63, 64
3. 위의 책, 64
4. 다음 책에서 인용했다. W. A. Spicer, (Washington, D. C. : Review and Herald, 1937), p. 30
5. <교회증언> 1권, 162; <영적 선물> 1권, 210, 211; 다음을 참고할 것. Peter M. van Bemmelen, ‘The Matchless Charms of Christ: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is Phrase in Ellen White’s Writings’, in <Christ, Salvation, and the Eschaton: Essays in Honor of Hans K. LaRondelle, ed. Daniel Heinz, JiříMoskala, and Peter M. van Bemmelen>(Berrien Springs, Mich.: Old Testament Department, Seventh-day Adventist Theological Seminary, Andrews University, 2010), p. 231~240
6. <정로의 계단>, 9
7. <부조와 선지자>, 33; <각 시대의 대쟁투>, 678
성령의 은사 중 하나는 예언하는 것이다. 이 은사는 남은 교회임을 확인하는 표징이며,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봉사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의 저술들은 지속적이고도 권위 있는 원천으로서 교회에 위로와 인도와 교훈과 교정을 제공한다. 또한 그의 저술들은 성경이 모든 가르침과 경험들을 시험하는 표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욜 2:28, 29; 행 2:14~21; 히 1:1~3; 계 12:17; 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