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공화국에서 3,052명이 침례 받다
10일 기도회의 대미를 장식한 역사적 안식일
앤드루 맥체스니, <애드벤티스트 월드> 뉴스 편집인
재림교회의 전 세계 10일 기도회 마지막 날, 도미니카 공화국 수도에 있는 경기장에 수천 명이 모여 3,052명의 침례식과 목사 110명의 안수식을 축하했다.
테드 N. C. 윌슨 대총회장을 비롯하여 재림교회 최고 지도자 29명이 1월 17일 산토도밍고의 엘 팔라시오 데 로스 데포르테스 경기장에서 열린 예배에 참석했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대한 감사와 성령께서 이 도시에 강력하게 역사하신 넘치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이곳을 떠납니다.” 1월 7~11일, ‘새해, 새 생명’이라는 주제로 경기장에서 저녁 집회를 인도한 마크 핀리 목사가 감격하여 말하였다.
도미니카 교회 연합에 따르면, 침례자 3,052명에는 1월 17일 안식일, 이 경기장에서 침례를 받은 1,800여 명과 1월 16, 17일에 그 외 도서 지역에서 침례 받은 수백여 명이 포함되어 있다. 앞서 열린 핀리 목사의 전도회 기간에도 수십 명이 침례 받았다.
“예수님은 반석이시요, 여러분은 그 반석 위에, 곧 예수 그리스도 위에 그분의 교회를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라고 윌슨 대총회장은 그 경기장에서 침례 후보자들에게 호소하였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십시오! 주님을 위해 사람들을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그분의 교회와, 그분의 예언적인 운동으로 이끄십시오!”
특히 한 침례식이 주목을 끌었다. 도미니카 공 화국에서 재림교회에 합류한 최초의 중국인 신자 휴 왕의 침례식이었다.
“왕 형제는 산토도밍고에 있는 재림교회 선교센터를 통해 지난 1년 반 동안 교회가 사역해 온 신자의 무리를 대표합니다.” 그 무리를 감독하고 있는 루이스 미구엘 아세베도 목사가 설명했다.
안식일 오후에 열린 안수식은 안수 받은 사역자 수, 참여한 교회 최고 지도자 및 국가 수에서 재림교회에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산토도밍고의 개최지에서 안수받은 26명을 포함하여 총 110명이 안수를 받았다. 안수식에는 세계 13개 지회 교회 지도자들이 대총회 부회장 및 기타 임원들과 함께 참여했고, 중앙아메리카지회 11개국 23개 교회 연합은 위성으로 안수식에 동참했다. 그 외에도 30여 명이 지회 전역에서 안수를 받았다.
대총회 주도로 진행된 연례 10일 기도회는 안식일을 정점으로 끝마쳤다. 기도주일 기간에 매일 전 세계에서는 성령의 임재를 위해 간구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셨다고 핀리 목사는 강조했다.
“저는 우리 재림교회 성도들의 선교에 대한 헌신과 교회의 증인과 삶에서 보여 준 청년들의 놀라운 참여 그리고 복음 전도 활동에 대한 교회 행정의 집중적인 관심에 깊은 인상을 받고 산토도밍고를 떠납니다.” 이어 그는 “행정가, 목사 그리고 평신도들이 긴박감을 가지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 안에서 연합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일을 행하셨음을 저는 느낍니다. 이곳을 떠나면서 만약 이러한 선교에 대한 관심으로 한마음이 되어 개인의 이기심을 버리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헌신한다면, 이것이 모든 교회와, 합회, 연합회와 지회의 우선순위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리브나 스테벤스, 인터-아메리카지회
뉴스 확대경
허버트 E. 더글러스가 재림교회 신학에 끼친 최대의 공헌
혼란의 시기에 명료한 제안을 위해 엘렌 G. 화잇의 저술을 활용
제리 문 앤드루스 대학교 교회사 학과장
1960년대 초 박사 과정 연구생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소재한 퍼시픽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허버트 E. 더글러스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현대 신학자들의 저작에 대한 독서 토론 과제를 부여받았다.
수업에서는 쟁쟁한 신학자들 간의 쉽지 않은 반박을 살피곤 했는데, 더글러스는 반 전체가 수긍할 만한 명쾌한 통찰을 제시했다.
처음에 동료들은 더글러스를 단순히 신학적 재능이 있는 학생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자 몇 명이 찾아와 물었다. “자네가 이런 통찰력을 얻는 것을 보면 뭔가 있는 게 틀림없어. 도대체 자네는 학교 과제물 외에 무얼 읽는 건가?”
그에 대한 대답으로 더글러스는 그들에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공동 창립자인 엘렌 화잇의 저술들을 소개했다. 한 급우는 <시대의 소망>을 읽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이제 자네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네. 이 저자는 글을 통해 자신을 입증하는군.”
이 일화를 나에게 전해 준 더글러스는 화잇 부인을 평생 신학 체계의 중심에 두었다. 만약 재림 신앙이 진리라면, 또 화잇 부인이 진실로 성경적인 신학 발전에 조력하도록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면, 그녀의 저술에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이 담겨 있어야만 한다고 그는 추론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2014년 12월 15일 숙환으로 87세의 삶을 내려놓기까지 그녀의 저술들을 깊이 이해하는 데 매달렸다.
20세기 선구적인 재림교회 신학자였던 더글러스가 화잇 부인에 대해 지닌 열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1950년대 젊은 목사로 발을 들여놓았던 재림교회의 격동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혁을 망각한 재림교회
재림교회가 종교 개혁에서 물려받은 핵심 가치가 있다. 인간은 자기만족과 타락에 빠지기 쉬우므로 교회가 개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계속 개혁하는 것뿐이라는 태도이다.
모든 교적 운동의 공통적 결함은 스스로를 ‘개혁된 존재’로 여기고, ‘지속적인 개혁’ 멈추는 것이다. 화잇 부인은 “우리는 개혁자들입니다.”라고 거듭 주장하였으며, 초기 재림교회는 예수 재림을 위한 준비로 종교 개혁을 완성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불행히도 1860~1870년대에는 몇몇 선구적인 복음전도자들이 교리적인 논쟁에 빠져들면서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도외시했다. 그 결과 올바른 교리는 깨달았지만 예수님과 매일의 친밀한 관계는 회복하지 못한, 자신들과 똑같은 교인을 양산했다.
1888년 교회 총회에서 두 젊은 사역자 E. J. 왜거너와 A. T. 존스는 개혁을 위한 이런 필요를 교회가 납득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대다수가 그들의 기별을 거절했다고 화잇 부인은 전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살아 있는 경험이 부족한데도 그 결핍을 깨닫지 못한 채 20세기로 들어선 재림교인이 많다. 대부분 개신교에서는 그들을 철저한 광신도 아니면 율법주의 분파로 간주했다.
1950년 대총회 기간에는 부흥과 개혁을 호소하며 이 결핍을 치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칭의의 법적인 관점에만 기초한 것이었지 고린도후서 5장 15~17절에 바울이 소개하고 화잇 부인이 승인한 완전한 “새로운 창조”가 아니었다.
아프리카로 떠난 젊은 재림교회 선교사 두 명이 이러한 항로 이탈에 항의하였고, 교회 지도부는 위협을 감지하였다. 교회 지도부는 대외적으로도 급소를 드러냈다. 1955년 복음주의 진영에서 재림교회를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이런 일들로 교회는 1957년 공식적으로 <교리적 질문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답변(Seventh-day Adventists Answer Questions on Doctrine)>를 출판하여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이 답변서에는 서두에 그 목적을 “믿음에 대한 새로운 진술이 아니라” 재림교회 “교리를 신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설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책으로 말미암아 제기된 쟁점들이 곧 교단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 속으로 그 젊은 재림교회 목회자 허버트 E. 더글러스가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재림교회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고 논쟁이 치열했던 6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953년 퍼시픽 유니언 대학의 부름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며, 곧이어 교비로 재림교회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었을 때 더글러스는 6년 차에 접어든 26세의 목회자였다.
당시 신학대학원과 대총회 본부 그리고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는 워싱턴 D. C. 타코마 파크에 나란히 위치해 있었다. 대단히 재능 있는 학자로 인식될 즈음, 더글러스는 리뷰 앤드 헤럴드사의 초청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 6, 7권을 준비하는 편집진에 합류하게 되었다.
엘렌 화잇에게서 답을 찾다
그렇게 더글러스는 깊어 가는 논쟁을 살펴볼 매우 좋은 자리에 부임하게 되었고, 해결책을 찾아 엘렌 화잇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더글러스는 1957년에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퍼시픽 유니언 칼리지로 복귀했고, 이어서 1960년에는 애틀랜타 유니언 대학(AUC)의 신학과장이 되었다. 1964년에는 퍼시픽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AUC에서 교무처장과 이후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1970년 <리뷰 앤드 헤럴드>(현 <애드벤티스트 리뷰>)의 편집인이었던 케네스 우드가 종합 교회 신문을 담당하는 부편집인으로 초청했을 때 더글러스는 대학에서 봉직 중이었다. 이때 비로소 더글러스는 다년간의 교수 활동 중에 발전시켜 온 개념에 기초한 논문과 책을 출판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수백 편의 논문 외에 그는 30여 권의 책을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책 <주님의 메신저(Messenger of the Lord)>(1998)는 <엘렌 G. 화잇 백과사전(Ellen G. White Encyclopedia)>(2013)보다 앞서 출판된, 화잇 관련 서적으로는 가장 방대한 저작이다.
더글러스는 선과 악의 투쟁에 대한 성경의 기술과 그에 대한 화잇의 주석에서 자신의 신학의 출발점을 찾았다. 죄의 시작,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사탄의 고소, 사탄의 모든 기소에 대한 종합적인 답변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전개 등은 대부분의 현대 신학이 가진 약점을 드러내 주었다.
대쟁투의 근본적 쟁점으로서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화잇의 초점이 더글러스의 신학적 체계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대쟁투 주제는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늘 성소에서의 사역 사이에 끼어든 기만적인 난제들을 명백히 드러내었고 또 해결해 주었다. 속죄의 목적은 죄가 낳은 하나님의 우주 안의 분열을 치유하는 것이었기에 십자가는 속죄의 중심이지 마침이 아닌 것은 확실하였다.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희생은 완전무결하고 충분하며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아침에도 여전히 오직 그분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우주적 사업이 남아 있었다.
더글러스의 신학적 체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다소 인생의 후반기에 출판된 세 권의 책,
그의 저술들을 읽고 매일의 삶에 그의 통찰력을 적용했던 수천의 재림 성도들에게 더글러스는 자신의 생애 동안 거인이자 전설이었다.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자신의 저작들을 통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재림교회 신학자 중 하나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감히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교회를 건축한 재림교회 최고 지도자들
윌슨 대총회장, 행정 업무를 잠시 접어 두고 실제 현장으로
리브나 스테벤스, 인터-아메리카지회
재림교회의 최고 지도자 29명이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한 교회 건물을 건축하면서 자신들의 휴대용 컴퓨터와 휴대폰 대신 페인트 붓과 삽을 들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테드 N. C. 윌슨 대총회장은 일주일간의 사무를 중단하고 지회장들, 대총회 부회장, 기타 고위 행정자들을 이끌고 카리브 해의 섬 도시 라로마나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실제적인 일을 하기 위해 행정적인 책임들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라고 윌슨 대총회장은 숙소에서 드린 아침 예배 중에 지도자들을 격려하였다. “이것 또한 확장 사업, 즉 교회를 넓히는 일입니다.”
교회 최고 지도자들은 매년 초에 소위 대총회장 행정 고문단(PREXAD) 기획 회의로 불리는 일을 위해 모인다. 하지만 올해에는 윌슨 대총회장이 교회를 건축하는 일까지 하도록 지도자들을 고무하였던 것이다. 회의에 앞서, 대총회는 1일 교회 건축 프로젝트로 알려진 재림교회 산하 기관인 마라나타 국제 자원봉사단과 연락했고 최종적으로 라로마나의 카오바 재림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교회 건축으로 신자 40여 명은 집회 장소를 얻게 되고 주민 1만 2,000명은 첫 담수 우물을 제공받는다. 그동안 교인들은 양철 판으로 지붕과 벽이 둘려 있고 비가 오면 질척거리는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낡은 장의자가 8개가 놓인 초라한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다. 어린이 안식일학교는 나무 밑에서 진행되었다.
1월 14일, 교회 지도자들은 새 교회의 두 화장실에 2차 도색을 끝내고, 벽돌을 쌓고, 건물 뼈대 위에 지붕을 얹었다. 그들은 또 하루 만에 안식일학교 교실로 사용될 철 골조 지붕 건물을 교회 옆에 세우기도 하였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국제적인 정취를 느끼면서 교회를 확장하기 위해 동역하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복음전도자 마크 핀리 목사가 대총회 부회장 엘라 시몬스와 알만도 미란다와 함께 화장실 벽을 칠하며 말했다.
핀리 목사는 일할 때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고 말했다. 정확히 칠할 것 그리고 그분을 섬길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것이었다.
대총회 부회장으로는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인 시몬스는 5년 임기를 두 번째 마쳐 가면서 이번이 교회 건축에 참여한 첫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여러 해 동안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에요.” 그녀는 말했다.
시몬스는 얼마간 페인트칠을 하더니 벽돌 쌓기는 벌써 졸업했다고 큰소리쳤다.
마라나타와 함께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이스라엘 레이토 인터-아메리카지회장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우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교회를 지었어요.”라고 그는 감격했다. “정말 행복합니다. 우리가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일선 교인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카오바 재림교회 담임인 에스테반 파레데스는 자신이 돌보는 여섯 교회 중 이 교회가 가장 작지만 이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한 지도자들의 결정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이 교회를 짓기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은 보기만 해도 기쁩니다.”
도미니카 공화국,
엘렌 G. 화잇의 이름을 기념한 거리가 생기다
세계 최초로 재림교회 공동 창립자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거리, 엘레나 G. 데 화이트
리브나 스테벤스, 인터-아메리카지회
도미니카 공화국의 한 도시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공동 창립자인 엘렌 G. 화잇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생겼다. 그녀가 자신의 저술로 전 세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인구 13만 명인 도시 라노마나의 결정으로 이 거리는 전 세계에서 화잇 여사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첫 번째 거리로 기록되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테드 N. C. 윌슨 대총회장과 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라 노마나의 마리차 수에로 시장은 제7번가를 ‘엘레나 G. 데 화이트’로 개칭한다고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도시로 선언한 라노마나에 오늘날 그리스도인 여러분이 끼치는 고귀한 감화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2015년 1월 15일 수에로 시장은 재림교회와 지도자들을 치하하였다.
윌슨 대총회장은 거리의 이름을 통해 화잇 여사의 유산을 기념한 것과 종교 자유를 촉진하기 위한 시의 노력 그리고 시장의 치하에 감사를 표하였다.
기념 행사가 끝나 갈 즈음, 시의 한 고위 관리는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10만 달러 이상 값이 나가는 토지 한 구획을 기부하겠다고 깜짝 선언을 하였다. 면적 500평방미터인 이 땅은 중상위 계층이 사는 구역에 위치해 있다.
엘레나 G. 화잇 거리는 빌라 알라크란 주거 지역 인근에 위치해 있고 알라크란 재림교회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다. 윌슨 대총회장과 교회 지도자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제막식을 거행하고 기도를 드렸다.
거리 이름을 개칭하려는 생각은 재림교인이자 지방의회 의원인 완치 메디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건강과 기타 영역에서 화잇 여사가 이 세상에 한 중요한 기여를 인정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대총회 총무이자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위원회 의장인 G. T. 응 목사는 화잇 여사의 이름을 따서 거리가 명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2015년은 엘렌 G. 화잇 여사가 타계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말했다.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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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헌신 : 목회자 26명(가운데 줄)이 교회 지도자들(왼쪽)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사모들이 뒤에 서 있다.
오른쪽 : 중국에서 건너오다 : 2015년 1월 17일, 이스라엘 레이토 인터-아메리카지회장이 중국인으로는 최초로 도미니카 재림교인이 된 휴 왕에게 침례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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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인 사상가 :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전신인 <리뷰 앤드 헤럴드> 부편집인으로 6년간 봉직하던 당시의 허버트 E. 더글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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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중 : 도미니카 공화국 라로마나의 빌라 카오바 재림교회 옆에 안식일학교 교실을 짓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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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표지판 : 테드 N. C. 윌슨 대총회장이 엘레나 G. 데 화이트 거리의 표지판 제막식에 참석했다. 옆에서 통역하는 사람은 아만도 미란다 대총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