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富)가 영성에 미치는 영향
줄리언 아처
신앙과 소득은 ‘시소 딜레마(seesaw dilemma)’를 야기한다. 시소는 전 세계 어느 놀이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원래 ‘시소’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이것저것’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시카(ci-ca)’를 그대로 영국식으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시소란 ‘양자택일’, ‘이것 또는 저것’을 선택하는 기계 장치를 뜻한다. 양쪽이 동시에 위로 올라가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한쪽만 위에 위치한다.
신앙과 돈의 관계가 그런 것일까? 우리는 신앙이나 재물 중 한 가지만을 소유할 수 있고 절대로 둘 다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일까? 상하가 엇갈리는 시소 현상은 단지 ‘위대한’ 신앙과 ‘막대한’ 재산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호주에서 배운 것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나의 모국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구 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에 속한다. 크레딧스위스의 2013년 ‘세계 부(富) 보고서(Global Wealth Report)’를 보면 오스트레일리아 성인은 스위스에 이어 지구에서 평균 순 자산이 두 번째로 많다. 성인 순 자산의 중앙값은 세계 최고로 스위스의 두 배 이상이다. 이는 우리가 극히 부유할 뿐 아니라 (항상 그렇게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부의 분배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균등함을 의미한다.
아쉬울 게 없을 만큼 충분한 수입을 얻는 한편 하나님과 든든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년간 애써 온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부(富)는 영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부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큰 신앙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그분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가? 돈은 신앙과 완전히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을까?
해답을 찾아서
2009년, 갤럽은 114개국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들이 던진 질문 중 하나는 “종교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인가?”였다. 또 각 나라의 1인당 소득 수준을 조사한 후에 그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 주었다.
자료를 통해 시소 효과가 진행 중임이 분명해졌다. 국가의 1인당 소득이 높을수록 일상생활에서 종교의 역할은 더 낮았고, 그 역(逆)도 마찬가지였다.
‘신앙 대 소득’이라는 시소에서 상∙하위에 있는 몇 국가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도표는 갤럽 여론 조사와 크레딧스위스의 세계 부(富) 보고서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다.
이 자료들은 종교의 중요성과 부의 수준 양면에서 세계 최고 부자(덜 종교적인) 나라들과 최고 가난한(더 종교적인) 나라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뚜렷이 보여 준다.
최고 부국 상위 10개국이 높은 경제 순위에 오르게 된 원인은 본래 그들이 기독교적 원칙 위에 사회와 사업 경영의 기초를 두어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시소는 기울었다. 풍요의 수준이 오를수록 종교와 영성은 곤두박질한다.
“경제적 안정이 확보되는 순간은 영성의 파산도 확실해지는 순간”이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언젠가 말했다.
간디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경제적으로 복을 받을 때가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단계임을 나는 개인적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수입이 오를수록 하나님은 덜 필요했다. 내 수입은 나의 영성을 그 대가로 요구했다.
꿈 같은 삶?
나는 ‘신앙 대(對) 소득’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가장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생기발랄하고 획기적인 관계를 마음 깊이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을 맛본다. 오직 영원한 것을 통해서만 참된 만족과 성취가 이른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우선순위에 집중해 살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이해했다. 수년간 ‘꿈 같은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에 목말랐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물질적인 복이 나의 영적 삶에 저주가 되었음을 마침내 깨달았다. 하나님의 복이 저주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그 복을 저주가 되는 방식으로 사용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복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도록 놔 두면 우리는 예수님께 마음 문을 열 수 없다. 그것은 저주, 곧 영원한 저주이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잘못 사용하여 저주에 이른 예가 성경에 가득하다. 신명기 6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곧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했다(3절).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말을 덧붙인다. 곧 “네가 먹고 배부르거든 너는 주의하여 이집트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를 잊지 말지니라”(11, 12절, 한글킹제임스). 배가 차면 졸음이 쏟아진다.
시소 효과에 관한 단상
안락한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이 시소는 무엇과 관계 있는가? 세 가지 영역을 살펴보자.
건축 : “더 큰 창고”를 짓고 이 땅에 재물을 쌓으면, 영원한 부에서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대신에 재물에 대해 더 많이 신경 쓰기 시작하며 그것을 지키고 증식시키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더 많이 투자한다. 소득은 늘지만 믿음은 줄어든다. 그리고 그것을 문제로 생각하지 못할 때도 많다(계 3:17절 참조).
시간 : 영적 무관심의 첫 번째 지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건너뛰거나 아예 갖지 않는 것이다. 재산, 사람, 여흥 등 다른 것에 더 몰두하면서 시간적 여유가 사라질 때 종종 그런 일이 생긴다. 단 며칠에 불과한 일일 수도, 혹은 수년 동안 그럴 수도 있다. 기도와 성경 연구로 값진 시간을 보내는 데 소홀하면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도 약해진다.
마음 : 선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선물에만 관심을 둘 때마다 신앙은 추락한다. 물질적인 복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그 문을 두드려도 잘 들리지 않는다(계 3:20). 노크 소리가 들린다 해도 물질의 복을 헤치고 나아가 문을 열기까지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이 복잡한 마음 증후군에 대해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의 크신 손님이 문 밖에 서 계시는데, 그분이 들어오는 입구를 막으려고 그대는 장애물을 쌓고 있다. 예수께서 그대에게 허락하신 번영은 그분의 노크 소리와도 같다. 그분께서 복을 많이 베푸신 것은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서다. 그대로부터 다른 이들에게로 그 복이 흘러넘치게 하기 위해서다. 이기심이 승리하도록 그냥 둘 것인가? 주께서 주신 복을 우상처럼 애지중지하다가 하나님의 달란트를 낭비하고 영혼을 잃어버릴 텐가?”1
매우 어려운 영역이다.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재산이 늘면 믿음은 줄어들어야 하는가? ‘신앙 대(對) 소득’이라는 시소는 변경할 수 없는 보편적인 원리인가?
시소 증상 깨뜨리기
풍요로운 생활 양식 속에 영적인 삶이 잠식당한다는 걸 깨달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치유법을 제공하신다. 그것은 심장 마비다! 육체적 심박 정지가 아니라, 전적으로 영적 심장 이식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36장 26절에서, 물질주의로 굳어진 마음을 대신할 새 마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다시 회심해야 한다. 우리는 활동적인 교인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업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영적 심장병에 걸려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적인 심장 이식이다.
‘믿음 대 재산’이 아니라 ‘믿음과 소득’이 될 수 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물론 재산에 개의치 않는 믿음이라면 더 좋다.
모든 면에서, 심지어 우리의 물질적 복에 대해서까지도 하나님께 충실하게 되기를.
줄리언 아처
1 Ellen G. White,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