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약속은 약속이다
데니스 마이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창 18:1).
아브라함의 ‘레스토랑’에서
위대한 이야기 중에 뉴욕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들 중 하나가 1984년에 일어났다.
로버트 커닝햄은 30년간 동네 경찰관으로 일해 왔다. 그는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인 ‘샐스 피제리아(Sal’s Pizzeria)’의 단골이었고 마치 자신이 그 가족의 일부인 것처럼 느꼈다.
필리스 펜조는 그 피자 가게의 점원이었다. 커닝햄은 매주 복권에 번호를 매겼다. 숫자 여섯 개를 써야 하는데 체계도 없었고 ‘행운의 숫자’도 없었다. 그는 매번 새로운 번호를 생각했다. 복권에 번호를 표시하다가 필리스를 불러 아직 세 개의 숫자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둘은 크게 웃으며 함께 숫자 셋을 선택했다. 커닝햄이 말했다. “만약 당첨된다면 당첨금을 자네와 나누겠네.” 농담으로 건넨 말일까, 아니면 진짜 약속이었을까?
창세기 1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레스토랑’에 오신다. 아브라함이 시중을 든다. 하나님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친구 아브라함을 만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만남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대화를 통해 이 특별한 만남의 이유가 분명해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구절 앞에서 비슷한 만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창 17:2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언약을 이삭과 세운다. 이삭은 사라가 내년 이맘때쯤 낳을 것이다”(창 17:21, 쉬운성경).
아브라함을 찾아가신 이유
하나님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를 방문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약속을 반복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점원 필리스가 경찰관 커닝햄의 약속을 ‘듣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들어야’ 했다.
그 장면을 그려 보기 위해 ‘거룩한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근사한 식사를 즐길 때 하나님께서 살짝 아브라함에게 기대어 말을 꺼내신다.
하나님 : “아브라함.”
아브라함 : “네, 하나님?”
하나님 : “석 달 전에 내가 말했던 것 기억하니?”
아브라함 : “물론입니다. 언약과 큰 나라 그리고 그 주변 환경에 대해 말씀하셨죠, 그렇죠?”
하나님 : “맞아. 그렇다면 아브라함, 큰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브라함 :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
하나님 : “그래. 그들은 어디에서 와야 하지? 내 말을 잘 기억해 보아라!”
아브라함 : “음, 분명 저와 사라로부터 와야 합니다.”
하나님 : “그렇다. 내가 석 달 전에 너에게 말했지. 1년 후면 사라가 아들을 가질 것이라고. 기억나니?”
아브라함: “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하나님 : “생각과 달리 너와 사라는 후손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했지?”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어조로 약속을 반복하신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
왜 하나님께서 마므레에 있는 아브라함을 방문하셨는지 이제 알 수 있다. 석 달이 지났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공허한 소리 같았다. 아마 그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신학자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해석에 문제가 있었다고 변명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지 않았다.
적용되지 않고 실행되지 않는 약속은 공허한 구절로 남거나 계시로 끝나 버린다.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란, 약속으로 가득 찬 가방을 지닌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다. 때때로 그것은 모두에게 적용된다. 어떤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동시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의 탄생을 선언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약속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음의 내용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약속은 과격하다. 우리가 예수와 얼마나 가깝다고 느끼는지 이 약속은 따져 묻지 않는다. 우리가 항상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도 개의치 않는다. 교리적으로 옳을 때만 성취되는 약속이 아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왕국에 참여하는 자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적용된다(18, 19절).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심각한 질병, 낙담, 우울증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여기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방문에서 배울 교훈은 종교적인 내용들이 아니라 약속에는 행동이 요구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부부간의 의무 실천함으로써만 약속된 아이를 얻을 수 있다. 약속의 성취는 행동에서 온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행동으로 표현한다.
내가 이 개념에 대해 설교했을 때 질병으로 크게 고통 받고 있던 한 신자가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치유를 구하는 기도가 왜 응답받지 못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야고보서 5장에 따라 그를 위해 기도했고 그는 “주께서 저(병든 자)를 일으키시리라”라는 15절을 문자 그대로 읽었다. 이 약속을 삶에서 실천적으로 주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이 약속은 ‘이것을 해라.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약속이란 신뢰할 수 있는 선언이며 사랑의 관계에 바탕을 둔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약속은 계속 실행되고 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가까이하고 싶은 그분만이 그러한 맹세를 할 수 있다. 이 약속은 질병과 아픔에도 적용된다. 당장 회복되는 모습이 보여야만 치유인 것은 아니다. 지금이 아닐 뿐이지 약속은 이루어진다. 어쩌면 부활 때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역시 신뢰의 문제이다.
그 약속은 믿음 안에서 살아 있다. 믿음이 자라는 것은 관계를 통해서다. 그리고 다시 관계는 믿음 안에서 돈독해진다. 한마디로 관계란 무한 동력 장치(perpetuum mobile)이다. 학자들은 이 장치를 수세기 동안 찾아 헤매고 있다. 자체의 에너지로 움직이며 그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는 것.
결국 엄밀히 말해 약속의 성취를 바란다면 목청을 높일 게 아니라 행동해야 한다. 약속을 내건 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매일의 삶으로 모셔 들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창 18:14).
성취된 약속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사라는 결국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는 하나님을 믿은 사라를 칭찬하고 있다(히 11:11).
그건 그렇고 교회의 그 아픈 신자는 상태가 호전되었다. 또 경찰관 커닝햄은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복권의 번호를 함께 기입하고 일주일이 지나서 그는 필리스에게 3백만 달러를 팁으로 주었다. 약속한 대로 복권 당첨금의 절반이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당신이 어떤 시련을 겪고 있든지 간에 그분은 당신을 떠나지 않으신다. 그 약속은 언제나 적용된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 그 믿음 속에서 살라.
데니스 마이어
한사합회장이며 가족과 함께 독일 함부르크에 살고 있다.
발문
약속의 성취는 행동에서 온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행동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