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인 유산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천사
낯선 사람과 함께한 성경 공부 두 시간
일레인 타르 도드
아이다는 읽기 과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4학년 교과서에 소개된 한 이야기에는 유독 흥미가 끌리고 눈길이 갔다. ‘달구지 끄는 사람’이라는 그 글에는 플레처 타르가 등장한다. 그는 1800년대에 남아프리카에서 자랐고 다이아몬드 광산에 생필품을 운반하여 팔다가 제칠일 안식일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이다는 누군가 자기 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개척자의 어린 시절
1861년에 태어난 데이비드 플레처 타르는 경건한 웨슬리 감리교 신자인 제임스와 해나(브렌트) 타르의 열여섯 자녀 중 열둘째였다. 오늘날 1820년대 정착민인 타르와 브렌트 가족은 남아프리카를 선택했다. 새로운 이민자였던 그들은 황야에 건물, 우물, 정원, 교회 등을 세워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냈다. ‘클럼버’라 부르는 그 교회에서는 지금도 집회가 이루어진다.
플레처 타르는 운동 신경이 뛰어나고 사격에 능했고 성경을 사랑했다. 15세에 주일학교 교사로, 이후 평신도 설교자로 활약했다. 1887년, 플레처의 사촌 앨버트 데이비스와 앨버트의 아내는 북서쪽으로 약 1,300킬로미터 떨어진 킴벌리 다이아몬드 광산까지 달구지를 이용해 물자를 실어 나르기로 했다. 플레처도 그 일에 관심이 생겼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를 북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새로운 땅을 향하여
그들은 짐을 가득 싣고 길을 개척해 가면서 여행했다. 몇 주 뒤 금요일 오후 늦게 그들은 킴벌리 외곽 비콘스필드에 도착했다. 소에게 풀을 먹이고 숙영할 장소를 찾던 중, 앨버트는 피터 웨셀스라는 농부를 소개받았다. 피터는 이후 24시간 동안 자신의 소유지에서 안식일에 어긋나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머물러도 된다고 허락했다. “안식일은 오늘 해 질 때부터 시작하여 내일 해가 질 때까지입니다.” 피터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똑똑하게 생긴 사람이 하루의 시작과 끝을 모르는 것 같아 앨버트는 의아했다. 이를 놓칠세라 웨셀스는 곧바로 성경을 폈고 그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한 앨버트는 급히 사촌에게 달려가 그 참신한 성경 해석을 전해 주었다.
성경 연구에 열심이던 플레처는 신빙성이 없다며 웨셀스의 말을 일축했다. 그러나 다음 날 웨셀스의 초대에 응하여 비콘스필드에 운집한 구세군 청중에게 가서 함께 말씀을 전했다.
이튿날 플레처가 혼자 묵상하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이 그의 텐트에 나타났다. 플레처는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플레처에 따르면 그 낯선 사람은 ‘주일 중 첫째 날의 신성성’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두 시간이 지났지만 일요일의 신성성에 관한 연구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그 남자는 갑자기 사라졌다. 플레처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고 지역 주민들도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낯선 사람은 참된 안식일을 확신시키기 위해 보냄 받은 천사였다고 그는 믿었다. 몇 시간 동안 자신을 살피며 기도한 끝에 플레처는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왜 달구지를 타고 북쪽으로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후 플레처의 사역을 통하여 그 일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하나님은 분명히 드러내셨다.
약 넉 달 후, 플레처의 동업자 앨버트와 앨버트의 아내가 웨셀스의 저수지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는 곧 친척, 친구와 함께 성경을 연구했고 I. J. 한킨스가 공중 설교에서 그를 지지하여 든든한 교회가 설립되었다. 지역 설교가 5명도 회심했다. 플레처가 사촌 에베네저 퍼든에게 기증받아 지은 예배당에는 현재도 지역 재림교인들이 모이고 있다. 플레처는 비콘스필드에 또 다른 교회 설립을 도왔다.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그 교회는 남아프리카 최초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로 알려져 있다. 잊지 못할 아침에 그가 텐트 안에서 천사를 만났던 장소와 거의 같은 곳에 위치한 교회이다.
맏형 제임스는 몇 주간 그와 함께 성경 연구를 진행했고 가족 전체가 교회에 출석했다. 제임스의 자녀는 15명이었다. 이어 둘째 형 월터와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왔다. 이 두 가정에서 안수 목사 네 명을 포함하여 17명이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 이후 교회를 섬기는 자손은 훨씬 더 많아졌다.
봉사의 확장
1890년에 플레처와 조카 둘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배틀크릭 대학에서 엘렌 화잇과 친분을 맺었다. 1893년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존 하비 켈로그의 수석 간호사였던 올리브(결혼 이전의 성은 필립스)를 신부로 데려왔다.
영어뿐 아니라 호사족 언어에도 유창했던 플레처는 원주민들을 위해 일했다. 올리브는 종종 집에 남았다. 골함석으로 만들어 여름에는 견딜 수 없이 뜨겁고 겨울에는 혹독하게 추운 집이었다.
어느 날 밤 올리브는 부엌 식탁 위에 과일을 말리면서 환기를 위해 출입문 윗부분을 열어 두었다. 별안간 험상궂은 얼굴이 문간에 나타났다. 올리브는 재빨리 위쪽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른 뒤 열려 있는 창문으로 달려가며 커다란 애완용 개 피터를 힘껏 불렀다. 험상궂은 얼굴이 창문에 나타남과 동시에 창문을 닫았다. 침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올리브가 커튼을 치자 커다란 돌이 창문을 박살내 버렸다. 그 순간 피터가 달려와 무단 침입자의 바지 엉덩이 부분을 물었다. 그 남자는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그 남자의 찢겨진 옷이 침실 창문 밖에 걸려 있었다.
결국 타르 부부와 아들 퍼시는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플레처는 영국인과 네덜란드 신자들을 보살폈다. 이후 국가 노동자에 해당하는 급료인 영국 돈 7파운드를 매달 받으며 대도시 여러 곳에서 복음 전도와 목회에 종사했다. 당시 기준으로 주급 7달러와 같은 금액이었다. 올리브는 그 수입으로 다섯 아들을 키웠다. 정장의 색이 바래면 겉감을 뒤집어서 솔기를 다시 꿰매어 새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가족들은 몇 푼을 아끼려고 수킬로미터씩 걸어 다녔다.
1916년경, 합회 임직원과 남편이 민망하게도 올리브는 도시 포트엘리자베스에서 빈궁한 과부들의 복지를 돌보는 직책을 떠맡았다. 포트엘리자베스 언덕에 쏟아부은 올리브의 수고 덕분에 가족은 매주 3달러를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건강이 나빠졌다.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1918년 독감 대유행 때 그녀는 도시의 수석 간호사로 임명되었다. 배틀크릭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플레처가 없을 때는 그녀가 안식일 아침 예배를 인도했다. 또 펌프 오르간을 연주하고, 노래를 지도하고,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 두 아들을 맨 앞줄에 놓고 강단에 서야 했다.
휴가와 이별
1921년, 올리브는 친구와 가족을 떠난 지 24년 만에 미국에서 생애 처음이자 유일한 휴가를 보냈다. 올리브의 옛 상사 켈로그 박사는 그녀를 만난 뒤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본인이 직접 시술했다. 이후 그녀는 다시 돌아와 12년 넘게 봉사했고, 1933년 63세의 나이로 이스트런던에서 별세했다.
아내의 사망 후, 플레처는 여전히 지역 교회를 섬기면서 아들들의 집에서 번갈아 살았다. 그의 손주들은 할아버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복음 전도를 위한 끊임없는 헌신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플레처는 1947년, 더반에 살다가 폐결핵으로 86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의 글귀가 적혀 있다. ‘생명의 시여자를 기다리며.’ 오늘날 남아프리카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그 기다림에 동참하고 있다. 그들이 물려받은 재림 신앙의 궤적에는 둘이 합쳐 99년간 아프리카에서 주님을 위해 봉사한 데이비드와 올리브 타르의 헌신이 각인되어 있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어린 아이다는 자라서 로마린다 대학교 물리치료학과에 입학했다. 플레처 타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경험한 신비스런 느낌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로마린다에서 아이다는 치대생 데이비드 오티스를 만나 주님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은 결혼했고 새 가정을 꾸렸다. 어느 날 데이비드는 소지품 중에서 4학년 읽기 교과서를 발견했다. 남아프리카 최초의 영어 사용 재림교인 목회자였던 증조할아버지 데이비드 플레처 타르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는 아이다에게 그 내용을 알려 주었고 아이다는 오래전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그 이야기에 사로잡혔을 때 하늘의 존재가 그녀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것이 분명하다.
일레인 타르 토드
‘It Is Written’의 홍보부장이었다. 1994년에 작고한 아버지 W. F. 타르가 처음 쓴 이야기를 그녀의 필체로 새로 적은 것이다. 일레인은 미국 테네시 칼리지데일에서 남편과 56년간 함께하고 있다.
캡션
왼쪽 : 데이비드와 올리브의 다섯 아들 : 플로이드(맨 왼쪽)은 대총회 부회장이 되었다. 가운데 : 올리브 필립스 타르는 한때 존 하비 켈로그의 개인 간호사였고 1893년에 데이브디 플레처 타르와 결혼했다. 오른쪽 : 데이비드 플레처 타르는 남아프리카에서 개척 목사, 복음 전도자, 교회 설립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