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되기도
치유가 되기도
말의 위력
테드 N. C. 윌슨
“막대기와 돌멩이는 내 뼈를 부러뜨리기도 하지만 말로는 절대 나를 다치게 못해.”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할 때 눈물을 흘리며 노랫말처럼 내뱉는 말이다. 알다시피 이 속담이 정확히 맞는 말은 아니다. 말도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리고 상처는 오래갈 때가 많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잠시 돌아보자. 누구의 말 때문에 얼마나 자주 상처를 입었는가? 또 전혀 악의 없이, 단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 남에게 상처를 준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나이가 들고 성숙해질수록 자기변호는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해 주셔야 함을 느낀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장 9절 말씀이다.
말의 중요성과 힘
말은 의사소통에 중요하다. 말을 하지 않고 온종일을 지내 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말은 치유가 되기도 하지만 성령께서 주관하지 않으시면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책 중 하나가 잠언이다. 그 책은 아주 실제적이면서도 진실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잠언 12장에는 다음과 같이 주옥같은 말이 가득하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18절).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22절).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 두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23절).
이런 지혜의 말뿐 아니라 약속들도 가득하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17:9).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27, 28절).
잠언은 지혜와 긍휼을 연관시키며, 우리의 천성을 따르지 말라고 이같이 격려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2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14:29).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25:21, 22).
잠언과 산상수훈
팔복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늘의 지혜를 따른다면 복을 받는다고 알려 주셨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권하셨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5, 7, 9). 지혜와 귱휼은 함께 간다.
뉴욕의 브루클린 병원에서 죽어 가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804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일하는 아들을 불렀다. 그 청년이 와서 이 죽어 가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온밤을 옆에 앉아서 이야기하며 힘을 주었다. 그 노인은 만남에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평안히 숨을 거두었다. 그 밤, 청년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돌아서거나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는 동정심을 가지고 임종 시간에 노인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님을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보호되어야만 한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아무리 완고하고 거친 성격이라도 유하게 만들며, 행실이 아무리 우악스럽고 괴벽할지라도 상냥하게 만든다. 또한, 말과 태도를 온순하고 우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순결하고 고결한 정신과 명랑한 기질을 결합시키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친절과 예의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가장 힘 있는 논증이다”(복음, 122).
‘하나님의 은혜’라는 필터
오늘날 문화에서, 소셜 미디어는 발전된 많은 분야에서 널리 퍼져 있고 거의 즉각적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웹사이트, 블로그, 이메일에서 언짢은 내용을 발견하면 곧바로 반응하기가 일쑤다. 우리는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곤 화면 위의 글자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반응 즉 모든 생각과 말을 은혜의 필터에 투과시키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점증하는 디지털 문화에서 우리에게 실제적인 인격적 만남은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 우리가 말할 때는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때로 무언가에 응답할 때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나는 조용한 방식으로 반응한다고 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과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음성의 변화나 억양, 말하는 방식이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격분하게 만들 수도 있다(교권, 175 참조).
하늘의 평화와 그리스도인의 재치
대총회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혜로운 권면을 숙고하면서, 발언과 표결에 참여하는 대표자 2,700여 명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모든 발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심지어 견해 차이가 나타나는 논의를 할 때도 그러하다.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과 태도를 하늘의 평안과 그리스도인 재치 그리고 서로를 위한 존중으로 은혜롭게 해 달라고 온 교회가 기도해 주기를 열렬한 마음으로 당부한다.
2014년 10월 연례위원회를 준비하면서, 우리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이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발언해 주기를 열렬히 호소했다. “우리 대총회와 지회 임직원들은 연례위원회의 모든 참석자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분명한 견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기를 호소합니다. 이 연례위원회 기간과 그 이후에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한 존중을 드러내기를 부탁합니다”(2014년 10월에 결의된, 대총회 및 지회 임직원들이 보내는 호소에서).
우리는 연례위원회에 나타난 사람들의 말과 응답에서 그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것을 보면서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심각한 견해 차이에도 그분의 임재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대총회와 지회 임직원들은 대총회 기간 동안 그리스도를 닮은 정신을 달라고 주님께 비슷한 호소를 드리려 한다. 결과에 상관없이,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 생애를 주관하신다는 사실, 의견이 다른 문제를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접근하는 모습을 세상에 증언할 수 있다.
정치적 예의로 그치지 말자
물론, 그리스도인 재치와 은혜는 공적인 공개 토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실 가정에서 시작된다.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어떤 어조로 말하는가? 냉혹하고 엄격한가? 아니면 부드럽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는가? 직장에서 너무 몰아붙여서 상대방이 퉁명스럽게 버벅거리며 대답하지는 않는가? 전화를 할 때, 우리는 정치적인 예의가 아닌 그리스도인 재치를 사용하는가? 우리는 이메일이나 다른 형태의 매체에 응답할 때 그리스도인 재치를 진실로 활용하고 있는가?
말이란 한 번 우리 입과 손끝을 떠나면 영원히 떠나 버린다. 다시 그들을 주워 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자. 상처 주는 글을 쓰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기에 앞서 기도하면서 세 번 생각하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니 말하기 전에, 마음과 혀를 주님께 내어 맡기라.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분께서 거르도록 하셔서, 정확하고 중요한 내용을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의 말씀은 하나도 감추지 않으셨지만 항상 그것을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최고의 재치와 사려와 친절한 관심을 활용하셨다. 그분께서는 무례하거나 쓸데없이 가혹한 말을 하거나 민감한 자에게 공연한 고통을 준 일이 전혀 없으셨다”(소망, 352).
세상의 사건들 속에서 마지막 예언 시나리오가 성취되는 이 시기에 우리 각자는 올바른 행실과 부드럽고 겸손한 정신을 통해 공개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우리 주님의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은 매일 주님과 교제할 때에만, 부흥과 개혁을 일으켜 달라고 성령께 간구할 때에만 가능하다. 지구 역사의 끝을 알리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소신껏 표현한 모든 말이, 살아 계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리스도인의 기지와 은혜 가운데 나눈 이야기로 하늘 책에 기록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