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유산
엘렌 골드 화잇
3부 1869~1881 장막부흥회 성황기
4부 1881~1891 1880년대
5부 1891~1900 호주 체류 기간
레우엘 U. 알모세라
하나님의 메신저
주도적인 영향력
엘렌 화잇의 생애와 유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1860년대 초에 설립된 이래 엘렌 화잇을 하나님의 메신저로 인정했다. 교회가 성숙해지는 동안 이 메신저의 생애는 교회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여기 그 이야기가 있다.
1869년 5월,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서 개최된 대총회 기간 동안, 총회는 “<교회증언>을 보다 주의 깊게 읽고, 보다 엄격하게 따르기로”1 결의했다. 총회가 끝난 후, 엘렌 화잇의 영향력은 확고하게 커졌다. 이 주도적인 영향력은 그녀의 집중적인 공중 설교 사역과 그녀의 기사, 팸플릿, 서적들을 교회 출판사가 출간함에 따라 유지되었다.
그러나 대총회 지도자들은 엘렌 화잇이 교회를 위해 행한 예언적 사역의 중요성과 중대함을 강조하는 일을 잠시 주저했다. 1871년 초, 재림교회는 교인 수가 12.8퍼센트 감소했다. 주된 이유는 그녀의 사역에서 나타난 예언적인 지도에 반대하는 태도가 쉬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 1871년 4월 30일의 꿈에서, 주께서는 엘렌 화잇에게 성경과 증언들 간의 관계를 정의하셨다. 엘렌 화잇은 이 인상 깊은 꿈을 이렇게 전했다. “주께서는 주신 증언들을 통해 그대에게 경고하고, 꾸짖고, 권면하며, 그대의 마음에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중요하다는 점을 각인시키고자 하신다. 기록된 증언들은 새 빛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드러난 영감의 진리들을 심령에 생생하게 새기고자 주어졌다.”2 버몬트 주 보도빌에서 있었던 1871년 12월 10일의 이상을 통해 영적 부흥이 촉발되었으며 엘렌 화잇의 예언적 사역은 더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제임스 화잇이 1871년의 대총회 회기 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대총회장 직임을 G. I. 버틀러에게 이임함에 따라 출판 사역을 통한 엘렌 화잇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만 갔다. 자신들의 사역을 확장시키고 엘렌이 더 많은 저술의 기회를 얻고자 이들 부부는 캘리포니아로 갔다.
‘인도하는 손길’과 1873년의 부흥
1873년,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두 곳에 사는 동안, 엘렌은 <리뷰 앤드 헤럴드>, <헬스 리포머>, <유스 인스트럭터>에 20여 기사를 기고했다. 그 기사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초점을 두었다.3 8월경 그녀는 <증언 23>을 출판했고, 거기서 그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를 묘사했다. 그 팸플릿의 부록에는 제임스 화잇이 적극적인 교세 확장을 위해 교회가 고려해야 할 주요 의제를 열거하는 ‘열렬한 호소’가 실렸다.
그 출판물들에 응답하여, G. I. 버틀러는 1873년 두 번째 대총회 개최를 호소했다. “인도하는 손길”4에 힘을 얻은 제임스와 엘렌 화잇은 회의에 참석하고자 11월 콜로라도를 떠났다. 배틀크릭에서 안식일 아침 예배 때 엘렌은 그리스도의 시험에 대한 능력 있는 말씀을 전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교회는 부흥을 경험했다. 그리고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중대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몸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제임스 화잇은 하나님의 메신저가 하는 일에 자신이 더 많은 영향력을 지녀야 한다고 느꼈다. 엘렌 화잇은 부부가 따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이라고 결정했다.5 그래서 1874년 여름, 엘렌은 캘리포니아에서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 첫 호 발간을 준비하는 제임스를 떠나 동부에서 개최되는 연례 장막 집회에 참석했다. 그녀의 목적 중 하나는 태평양 연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사업을 도울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임스는 1874년에 다시 대총회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엘렌은 교회의 발전을 위한 전략적인 방향을 정하는 데 더 나은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여기 두 가지 사례가 있다. 1875년 1월 3일, 이상을 통해 교회의 세계 선교에 필요한 몇 가지 주요 전략이 제시되었다(외국으로 선교사를 보내고 많은 나라에 출판사를 세우는 일). 그리고 1875년 9월 12일, 뉴욕 주 롬에서 엘렌 화잇은 문서 선교 사업의 중요성을 꿈을 통해 보았다. 이로 인해 가장 성공적인 세계 선교 프로그램 중 하나인 문서 전도 사업이 탄생되었다.
발전의 시기
1874년에 겪었던 부부 갈등이 다시 나타나는 듯했다. 1876년 겨울 동안 캘리포니아에 있었던 엘렌 화잇은 동부로 가는 제임스와 동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미뤄진 저술을 마치고자 결심했다. 그렇지만 뒤에 동부에서 제임스를 만났고 엘렌은 그해 장막 집회 장소 14곳에 참석했다. 집회는 성공적이었고 엘렌 화잇 사역의 영향력은 훨씬 환하게 빛났다. 그중 가장 기념비적인 것은 약 2만 명이 참석한 매사추세츠, 그로브랜드(헤이버힐 부근)에서 개최된 회합이었다. 그 특별한 야영회에 대해 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특별 열차들이 로렌스, 뉴베리포트, 헤이버힐 등의 도시로부터 운행되었다. 오전 9시에 집회장은 지성적인 사람들로 넘쳐 났다. …주변 도시에서 사람들이 계속 몰려왔고 열차에는 여전히 도시들에서 온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열차마다 승객을 가득 싣고 왔다. …어마어마한 회중이 엄숙하고 조용하게 있는 가운데 화잇 여사가 강단에 올라 그리스도인 절제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녀는 이 주제를 독창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다루었고 청중은 저마다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6
엘렌 화잇의 영향력은 해마다 확대되었다. 1875~1878년에 그녀는 여러 교회 신문에 250여 기사를 기고했다. 그녀는 심지어 오리건에 합회를 조직했고 텍사스합회 조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텍사스에서는 21살의 청년 A. G. 다니엘스를 만났다. 후에 그는 대총회장이 되어 가장 오랫동안 직임을 맡았다(1901~1922).
1878년 가을에 엘렌 화잇은 ‘엄숙한 심판’에 관한 이상(10월 23일)과 11월 23일의 또 한 번의 이상을 포함하여 여러 번 이상을 받았다. 그해 대총회가 채택한 주요 결의들은 이 이상에 대한 응답이었다.
시련의 시기
그러나 앞서 언급한 1878년의 이상에 포함된 질책과 훈계로 인해 어려움이 발생했다. 교인들은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몇몇 주요 지도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몇 사람은 자신들의 불만을 터뜨리기 위해 일반 신문사로 향했다.
이에 대응해서 엘렌 화잇은 1880년, S. N. 해스켈, W. C. 화잇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파송되었다. 그녀는 후에 이같이 진술했다. “이곳 사건들의 뒤얽힌 상황으로 인해 고통스럽다.”7 제임스의 변덕스런 판단과 독재적인 지도자 스타일에 대해 그에게 날카로운 증언을 진술할 때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있었다.8 그녀는 심지어 제임스에게 지금이 물러나야 할 때라고 암시하기도 했다.
결국 1880년 대총회에서 제임스 화잇은 대총회장직을 버틀러에게 넘겼다. 12월에 화잇 부부는 은퇴하여 배틀크릭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고궉 호수 근처의 집으로 이사했다. 다음은 엘렌 화잇의 기록이다. “나는 내 형제들에게도 권면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은 위기의 때이다. 지금 배틀크릭은 이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상태이다.”9 감사하게도, 엘렌 화잇의 개인적인 사역을 통해 1881년 7월경 좀 더 안정된 분위기가 널리 퍼져 나갔다.
1881년 8월 6일 안식일, 오전 5시가 조금 지나서 제임스가 배틀크릭 병원에서 사망했다. 1881년 8월 13일, 다임 태버너클 교회에서 있었던 장례식에서, 거의 35년의 결혼 생활을 보낸 엘렌은 “나는 외로울 것이다. 그러나 외롭지 않기도 할 것이다. 내 구주께서 나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10라고 말했다.
시련과 발전의 시기에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주도적인 영향력’으로서 계속 사역할 것을 엘렌 화잇은 분명하게 받아들였다.
1. Ellen G. White, in
2. <교회증언> 2권, 605; 꿈의 내용은 604, 605쪽에 있다.
3. <유스 인스트럭터>에 기고된 엘렌 화잇의 모든 기사와 <리뷰 앤드 헤럴드>, <사인즈 오브 타임즈>의 많은 기사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것이었다.
4. 제임스 화잇은 이 ‘인도하는 손길’에 대해 언급했다. 그 손길에 영향을 받아 화잇 부부는 20차 대총회에 참석기로 결정했다(
5 Ellen G. White
6
7 Ellen G. White
8 Ellen G. White
9 Ellen G. White
10. Ellen G. White, in In Memoriam: A Sketch of the Last Sickness and Death of Elder James White
레우엘 U. 알모세라이스
필리핀에 있는 재림교회 국제대학원(AIIAS) 내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위원회 지부의 지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