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몰랐다고 말하면 핑계일 뿐이다. 제자의 길에서는 고난도 맞닥뜨린다고 우리는 충고와 주의, 심지어 경고까지 받았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도들의 교훈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낙관론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앙 문제로 시련당하는 경험을 이례적이고 드문 일 취급하는 까닭은 번영과 평화의 복음만 부르짖는 설교자들에 의해 성경의 진리가 왜곡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미는 평화와 기쁨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순례자의 길에는 즐거움도 따르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충성하면 거의 예외 없이 박해가 따른다고 말하는 찬미가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종교 개혁 당시의 교회는 그런 기별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는데 말이다.
500년 전, 사려 깊은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은 가사를 지었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에 힘을 써
궤휼과 권세로 제 무기 삼으나
주 권능 당치 못하리.”
한 세대 전에 마틴 루터 킹은, 가슴 아플 만큼 솔직하게 노예 제도와 억압을 성토하는 미국 흑인 영가를 힘차게 불렀다. 오늘날 이런 노래를 가르쳐 줄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를 공경하지 않는 세상의 분노와 적개심을 일상처럼 여기라는 메시지를 안식일 아침에 어디에서 들을 수 있는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팔복(마 5:3~12) 중에서는 마지막 내용이, 다시 말해 제자로 사는 사람은 박해를 당연히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가장 길다. 덧붙인 설명까지 포함하면 전체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
러시아 공산 치하에서 피어난 용기와 뚝심의 기막힌 스토리를 이번 달 특집 기사로 읽으면서, 왕국이 이르기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있는 지구 상 믿음의 동료 수천 명을 위해 기도하기 바란다.
월드뷰 2015년 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