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에서 축복으로
바버라 허프
시베리아에서 지켜낸 믿음과 안식일
발렌티나의 반짝이는 눈과 넘치는 에너지만 본다면, 그녀가 인생의 대부분을 시베리아의 척박한 환경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러시아 여성 중에는 나이 60이 되면 기력이 약해지고 긴 세월 동안 겪은 불편, 고민, 낙심의 흔적이 얼굴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발렌티나는 달랐다! 다른 사람이 걸을 때 그녀는 달렸다. 다른 사람이 천천히 발걸음을 뗄 때 그녀는 뛰어다녔다. 그녀의 미소로 어두운 방이 환해졌고 푸른 눈동자에서는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처음에
알렉산드르 (사샤) 이바노프는 1959년 모스크바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의과 대학 졸업생에게는 3년 동안 일할 곳이 배정되었다. 3년 후에는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사샤는 의과 대학에 남아서 가르칠 것인지, 시베리아 오시니키에 가서 근무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모스크바에 남으면 안식일이 문제될 것을 그는 알았다. 시베리아같이 먼 곳으로 가면 문제가 더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시베리아를 선택했다. 1년 후 사샤는 발렌티나와 결혼했다.
첫 직장부터 사샤는 안식일 준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오시니키에서 첫 안식일에는 근무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 다음 주가 되자 안식일에 근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의대 졸업 후 2년 동안 사샤는 8개 도시를 오가며 다양한 일을 맡았다. 그중 1년 동안은 한 가지 일에만 종사했다. 그는 공산주의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밤낮으로 감시당했다.
사샤는 가정 예배를 드리다가 국가안보위원회(KGB)에 적발되었고 지역 신문은 일제히 외과용 메스 대신 성경을 선택한 사샤에 대해 보도했다. 사샤는 의사 면허증이 취소될까 두려웠다. 이 와중에도 성격이 밝은 발렌티나는 사샤를 변함없이 지지했고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첫딸 나디아가 태어났다.
1962년 사샤는 구급차 동승 의사로 지원하기 위해 안제르카로 갔다. 그는 금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면 어느 시간에라도 근무할 수 있다고 했지만, 금요일과 토요일에도 어김없이 근무가 잡혀 있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곧 해고되었다. 몇 주 동안 그는 전혀 일을 하지 못했다.
다음 주, KGB는 주말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면 체포할 것이라고 사샤에게 통보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어떤 일이라도 찾아야 했다. 사람을 구한다는 가게에 들어가 보았지만, 곧바로 돌아 나와야 했다. 가게 주인들은 “네, 사람을 구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샤가 여권을 보여 주자, “미안합니다만, 당신은 안 됩니다.”라고 말을 바꿨다.
체포가 불가피해 보였다.
어느 날 사샤는 도장공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네, 도장공이 필요합니다. 여권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라고 주인이 말했다. 여권에 있는 이름을 보더니 주인이 말했다. “이바노프 씨, 원래 당신에게 말하면 안 되지만, 사실 국가안보위원회가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고용하지 말라고 통보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샤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내일이면 당국에 가서 보고하는 일만 남았다. 한 주가 끝났는데 아직도 일을 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체포
이튿날 아침, 사샤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KGB 사무소를 향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자 발렌티나는 남편이 체포되었음을 직감했다. 3일간의 구금과 모의 재판 뒤에 3년 추방령을 받고 마리인스크 집단 농장으로 옮겨졌다. 발렌티나가 사샤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한 달 뒤였다. 당시 발렌티나의 나이는 25세, 나디아는 생후 13개월이었다.
발렌티나는 마침내 사샤가 마리인스크 근처 ‘빅토리’라는 집단 농장에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농장 이름 하나만 믿고 그녀는 큰 가방과 배낭을 메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어린 나디아를 친구에게 잠시 맡긴 뒤 7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마침내 마리인스크에 도착했다.
농장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한동안 수소문했고 결국 빅토리 농장에 트럭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그 사람을 만나 빅토리 농장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정치범, 사샤처럼 죄 없이 기소 추방된 이들, 종신형을 선고받은 범죄자 등 다양한 사람이 끌려갔다. 발렌티나가 보기에 트럭 운전사는 종신형 죄수가 분명했지만 농장으로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사샤를 꼭 만나야 했다. 사샤에게 이곳 음식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남편에게는 용기와 격려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눈보라가 몰아쳤고 마지막 언덕에서 트럭이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 농장까지 1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은 거리였다. 발렌티나는 트럭에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눈보라를 헤치며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농장에 점점 가까워지자, 막사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가까이 갔을 때 건물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혹시 여기에 사샤 이바노프라는 사람이 있나요?” 발렌티나가 만난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남편 사샤였다. 기쁨의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자기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용감한 아내를 보고 사샤 역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발렌티나는 농장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집에 돌아와 마리인스크로 이사할 준비를 했다. 당시에는 추방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가족과 함께 사는 것만큼은 허용되었다.
발렌티나와 나디아가 빅토리 농장에 도착하자, 이들 가족에게 작은 집이 배정되었다. 그 집에는 1937년에 추방형을 선고받은 남편과 함께 살던 여자도 한 명 있었다. 남편은 이미 죽었지만 그녀는 달리 갈 곳이 없어 계속 머물던 것이다
작은 집에서 이바노프 가족에게 허락된 공간은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한쪽 구석뿐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이었지만 함께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 가족은 충분히 행복했고 그렇게 열흘간 가족이 함께 지냈다. 어느 날, 농장의 동물을 돌보는 사샤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또 옮겨 간 것이다. 후일 발렌티나가 샤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당 간부가 샤사에게 이 나라는 의사를 고작 돼지 농장에서 부려 먹을 만큼 한가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했다고 한다. 막무가내인 공산주의자들도 사샤의 재능과 진실성만큼은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발렌티나는 다시 남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마침내 사샤는 조줄린 목사에게 편지를 보냈고 조줄린 목사는 발렌티나와 나디아가 기차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남편을 찾기 위한 발렌티나의 두 번째 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착하고 충성된 종
기차역에서 사샤는 가족과 기쁨의 재회를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머나먼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들은 먼저 트럭을 타고 5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이후 50킬로미터가 더 남았을 때 사샤는 반쯤 기운이 빠진 몽골 조랑말 한 마리를 구했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썰매에 싣고 어린 나디아를 짐 위에 눕힌 뒤 사샤와 발렌티나가 뒤를 따라 걸어갔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였지요.”라고 발렌티나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기도 했다. 해빙기라 이들이 지나는 통로 양쪽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어둠이 찾아왔지만 여행을 계속했다.
갑자기 정적이 깨졌다. 또 다른 말과 수레가 소리를 내며 그들을 향해 얼음길 위로 달려왔다. 이내 좁은 통로에서 말 두 마리가 얼굴을 마주 보고 섰다. 동시에 교차할 만큼 공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맞은편 수레에 타고 있던 사람은 위험한 상황도 모른 채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다.
사샤가 생각해 낸 방법은 썰매를 기울여 한쪽을 젖혀 세운 다음 살짝 들어서 얼음 바깥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옮겨 놓아 말 두 마리가 서로 교차할 수 있게 길을 터 주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진이 다 빠져 버렸지만 사샤와 발렌티나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다. 마침내 하룻밤을 묵을 집 하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목적지까지는 25킬로미터, 절반이 남았다. 이튿날 그들은 드디어 배정받은 오두막집을 찾았다. 창문도 없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지치고 피곤한 이들에게는 가장 반가운 곳이었다. 산을 끼고 강물이 흐르는 계곡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그때가 3월이었기 때문에 발렌티나는 시간을 들여 텃밭을 가꾸었고 9월에 사샤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3년의 유배 기간 동안 이들은 4번이나 옮겨 다녔다. 형이 끝나 갈 무렵, 둘째 딸 타냐가 태어났다. 도시에 거주하는 재림교인은 일자리가 없거나 하찮고 고된 일을 해야 했지만, 사샤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도시의 재림교인들은 지치고 피곤했지만 사샤의 가족은 누구에게도 괴롭힘 당하지 않았다. 비옥한 시베리아 토지에는 소출이 풍성하여 훌륭한 식재료를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사샤 가족에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시베리아 지방 교도소에서 사샤에게 일을 제안했다. 사샤의 가족들은 놀라운 한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배 기간 동안 사샤에게는 일을 선택할 권한이 없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사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것이다. “이바노프 선생님, 일자리를 찾을 때마다 안식일 문제로 힘드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선생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니 우리를 위해 다른 시설에서 일해 주십시오.”라고 교도소 관리자가 말했다.
교도소 관계자들은 사샤 가족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헬리콥터를 보내 주었다. 또한 가구를 준비하여 이들 가족이 새로운 곳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노보쿠즈네츠크였고 25년간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나디아와 타냐는 10년 동안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작은 아파트에는 화장실이나 하수관도 없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았지만, 사샤 가족은 장작 난로를 피워 요리를 하며 행복하게 지냈다.
하나님의 자녀
이제 사샤는 안식일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또한 시베리아에서 외과의사로 30년간 일했다.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에 대해 물었을 때 발렌티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없어요. 모든 일이 쉬웠던 걸요.”
그러나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디나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니까 두려워지더라고요. 우리는 안식일에 나디아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KGB는 나디아를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협박을 했으니까요.”
어느 안식일에 나디아의 선생님이 나디아를 학교에 데려가려고 집까지 찾아왔다. “지금 학교에 가지 않으면 나는 너를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단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어린 나디아는 안식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교육 담당관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여자아이는 어떤 학생입니까?” 담당관이 물었다.
나디아의 성적은 전 과목이 A라고 선생이 말했다.
교육부에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나디아를 집에 있도록 합시다. 매일 학교에 간다고 해서 학생들이 모두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5학년이 되면서 안식일 준수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학교에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오전 또는 오후에 등교했다. 오후반 수업은 2시에 시작했다.
문제는 12월과 1월의 일몰 시간이 오후 3시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겨울 내내 나디아 그리고 이후 타냐는 매주 이틀씩 결석해야 했다.
나디아는 일요일마다 밀린 숙제와 공부를 했다고 회상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수업을 빠졌기 때문에 숙제가 무엇인지, 수업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반 친구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친구들은 하나같이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디아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말라고 지시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디아는 끊임없이 공부했으며 결국 1등으로 졸업했다.
발렌티나의 두 딸이 학생 시절을 외롭게 지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나디아는 대답했다. 이들은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 상황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는 선생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나디아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가족은 정신이 나간 위험한 가족으로 낙인찍혔다. 이웃집 아이들은 그 집에 놀러 가지 말라고 부모에게 주의를 받았다.
7학년이 되어서야 나디아는 마침내 돌파구를 찾았다. 툭하면 집에 혼자 남게 된 이웃집 아이들이 숙제를 위해 두 자매의 집에 종종 놀러 왔던 것이다. 이후 다른 아이들도 나디아의 집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나디아의 가족이 지극히 정상적이며 어떤 집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나디아의 집에는 라디오와 피아노가 있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두 딸을 고아원에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발렌티나는 이제 하나님께 신실하면서도 이웃에게 인정받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가정이 시베리아로 추방당했던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왜 안타까워하는지 발렌티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늘 기쁨과 행복과 장밋빛이 가득한 인생은 없어요. 사람마다 문제와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지요. 이러한 어려움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고요.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극복하고 살아남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뿐이에요. 매일의 삶에서 그분의 안내와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답니다.”
시베리아는 자연 그대로의 숲, 바람, 늑대, 곰 등의 야생 동물이 살아 있는 추운 곳이다. 그러나 발렌티나는 여기에 따뜻함, 기쁨, 평화 그리고 행복을 채워 넣었다. 발렌티나가 정말 추방당했던 것일까? 여러분이 판단해 보시길….
바바라 J. 허프
남편 리와 함께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살고 있다. 러시아에 거주할 때 발렌티나와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정리했다. 사샤(80)와 발렌티나(77)는 현재 은퇴하여 벨고로드에서 살고 있다. 큰딸 나디아 이바노프는 로마린다 대학에서 공중 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고 현재 모스크바에서 유로-아시아지회 보건전도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둘째 딸 타냐는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