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탄하라
마르코스 파세그히
참믿음은 창조주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시작한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경탄(敬歎)이 없으면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의 입장에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 당신의 약혼자는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재능이 넘치는 남자이다. 그와 함께하면 인생의 상당 부분이 나아질 게 분명하다. 사람들은 그를 ‘좋은 신랑감’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당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경멸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그 남자가 당신 앞에서 젠체하는 것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쭐거리고 거들먹거리든지. 어쩌면 그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를 경멸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그를 보고 미소 지으며 “자기야~”라고 부른다 해도 말이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런 관계는 틀림없이 실패로 끝난다.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 사랑은 가짜다. 시늉은 할 수 있고 ‘바르게’ 행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이 자연스럽고 강렬하게 샘솟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교회 생활에 적용해 보자. 당신은 교회 예배, 집회, 프로그램에 결코 빠지지 않는 신실한 소수에 포함된다. 그러나 당신은 두려워서 혹은 순전히 의무감으로 참석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던 유력한 집단과 다를 게 없다. 그들은 억지 순종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소개했고, “세상이 하나님을 폭군으로 바라보게”(소망, 36) 만들었다.
진정 우리가 “자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정로, 10)을 가장 큰 소원으로 여기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분과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분의 작품을 존경하는 것도 그중 한 가지이다(롬 1:20 참조).
번지수를 바로 찾은 경외
역사를 돌이켜 보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해 경외감을 느낄 때 종종 위대한 발명, 발견, 사상이 시작되었다. 갈릴레오나 뉴턴이 그 예이다. 그러나 중요한 기준 틀이 없다면, 죄에 얼룩지고 훼손된 시각으로는 아무리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이내 창조주를 떠나 표류하게 된다. 그러고는 우리 자신이 만든 한심한 ‘신들’을 경배하기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를 생각해 보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앞에 깊은 경외감을 느낀 나머지 그들은 복수심과 욕정을 따르는 근친상간적인 신들로 가득한, 뒤엉킨 세계를 창조해 냈다. 그 신들이란 비뚤어진 길을 추구하는 인간과 안쓰러울 정도로 똑같다.
충성스런 경배가 방향을 잘못 잡거나 모순적일 때가 자주 있다. ‘대자연의 지혜’를 찬양하는 것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대자연의 상냥함’을 칭송하는 것도 전혀 상냥한 행동이 아니다. 자연 자체를 경외하는 행동은 갈증을 없애겠다고 머릿속으로 물의 특성을 되새기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다. 근본적인 ‘거대 담론’(재림교인에게는 대쟁투 주제가 여기에 해당한다.)이 없다면, 우리가 기울인 최선의 노력은 결국 “철저히 헛된 것”, “바람을 잡으려는 것”(전 1:2, 14, 타나크)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또 한 번 우리는 손안에 있는 부질없는 열매를 경외한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경이 중의 경이
우리는 헌신의 폭이 매우 좁은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첨단 기기에 열광하면서도 자연계의 경이, 인간 신체의 놀라운 기능, 상상할 수 없이 광대한 우주에 대해서는 눈먼 사람처럼 지나쳐 버린다. 기적적인 경이에 끊임없이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신통치 않고 시답잖은 경험에만 눈길을 돌린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들의 백합화)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장 29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좀 과장하여 설명하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솔로몬을 지혜로운 재판관이자 명민한 정치가라고 생각하지만, 나무와 새와 기어다니는 것들과 물고기에 대한 그의 논증(왕상 4:33)은 무시해 버리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는 문구는 방싯방싯 피는 꽃봉오리마다 뾰족뾰족 돋아나는 풀싹마다 기록되었다.”(정로, 10)라는 엘렌 G. 화잇의 유명한 진술을 그저 멋진 은유로만 여기지는 않았는가?
전능하신 창조주를 신뢰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들이 너무나 자주 변증법에 말려들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초월적 이해를 방해하고 마는 것은, 마치 “신앙의 바다”가 “세상의 거대하고 황량한 가장자리”*로 계속 물러나는 모양새다. 그러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벧후 3:13) 즐거워하는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연에 대한 그분의 지속적인 보살핌 속에서 다가올 회복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주를 경배
성경의 마지막 책은 세 천사의 기별(계 14:6~11)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그 메시지는 주님의 메신저, 즉 “말세를 만난”(고전 10:11) 자들이 선포하는 메시지이다. 엄숙한 마지막 기별에서조차 역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외침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한마디의 경고가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에서 가장 중요하다. 근본적으로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메시지의 나머지를 전하는 일은 거의 쓸데없는 짓이다. 바벨론의 몰락에 관한 심판의 선언에서부터 짐승에게 경배하지 말라는 명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창 1:31) 창조의 첫 일주일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자주 되돌아보고, 더 자주 눈여겨 살펴야 할 것이 바로 이 이상이다.
경이감을 되찾으라
사그라진 경이감을 되찾고 싶다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것을 얻을 수 있다. 흔히 삶의 가장 단순한 기쁨 속에서 대단한 해답이 발견된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햇빛과 비”, “언덕과 바다와 들판”(정로, 9)을 통해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께서는 “아름다운 새, 예쁜 꽃, 우람한 나무”(정로, 10)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공원길을 걷고, 애완동물을 사랑스럽게 쓰다듬고, 통통한 아기와 놀고, 텃밭을 가꾸어 보라고. 또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맛있는 건강 요리를 준비하고, 석양을 응시해도 좋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딤전 6:17)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아주 속히 “만물을 새롭게 하실 분”(계 21:5)의 무한하신 지혜를 찬양하는 것도 잊지 말라.
그러면 우리의 경외감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코스 파세그히
목사이자 번역가, 저술가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 오타와에 살고 있다.
* Matthew Arnold, “Dover Beach,”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