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 정신
최초의 대총회
데이비드 트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오랫동안 선구자들을 보며 영감을 얻었다. 2015년 7월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개최될 제60회 대총회를 앞두고 152년 전의 창립 총회로부터 교훈과 영감적인 요점들을 배워야 한다. 바로 1863년 5월 미시간 배틀크릭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지도자들이 한자리에”라는 표현이 지금은 아주 익숙하다. 그러나 첫 회기가 시작되기 32개월 전에는 그런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1860년 10월 1일 배틀크릭에서 첫 모임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우리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라고 부르기로”1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제칠일 재림교인’이라는 말은 적대적인 이들이 비아냥거리는 표현으로 사용해 왔던 말이다. 또 1844년의 대실망 이후 제칠일 안식일과 조건적인 불멸 그리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사역이라는 신념에 기초하여 형성된 운동에 가담한 소수가 사용하던 말이다.
1860년 모임에서는, 하나님의 남은 자손이 공식적으로 지역 교회를 조직하고 정식 명칭을 채택한다면 바벨론으로 물러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합의하는 데 4일이 걸렸다. 그러나 몇 발짝 걸음을 떼는 것도 재림교회가 가야 할 길만큼이나 먼 여정이었다. 지역 교회 위에 어떤 조직이 들어서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합회와 대총회
그럼에도 2년 반 만에 미시간, 아이오와, 버몬트, 위스콘신, 일리노이, 미네소타, 뉴욕에 ‘합회(Conference)’라는 일곱 개의 교회 협회를 조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이오와에 두 합회가 있었고, 일리노이와 위스콘신이 한 합회로 구성되었다. 나머지는 주마다 합회가 하나였다가 이후 아이오와에 있던 두 합회를 하나로 합쳤다. 그러나 당시 재림교인 중에는 하나의 교단이 아니라 여섯 개의 재림교회 교파가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1863년 3월에 비공식적인(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재림교회 지도자 제임스 화잇이 <애드벤트 리뷰 앤드 새버스 헤럴드>(오늘날의 <애드벤티스트 리뷰>, 흔히 ‘리뷰 앤드 헤럴드’로 불렸음)에 흩어진 신자를 함께 모으는 ‘대총회’ 소집 기사를 게재했다.
대총회는 1840년대 초 밀러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용어이다. 거기서 조셉 베이츠는 회장을 맡기도 했다. 1850년대에는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 신도들이 그 용어를 사용하여 회합을 가졌다. 안식일 준수자들의 독특한 교리를 지지한다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지역적이기보다는 총괄적인 합회 또는 회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860년대에는 미국의 여러 신교 교단에서 ‘합회’라는 이름으로 상설 협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재림교회의 주 합회는 그것을 도입했다. 더욱이 메노나이트, 침례교, 감리교에는 합회들의 조합인 대총회가 있었다. 침례교, 감리교 출신이 많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이러한 체제에 익숙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 화잇이 1863년 3월 10일 자 <리뷰>지에 중대한 공통의 관심사를 토의할 것이라고 공지했음에도 안식일 준수자 중 더러는 이것을 또 하나의 일반 회의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배틀크릭에 있는 미시간 주 합회와 연계하여 대총회가 가능한 한 조속히 개최될 수 있기를 요망합니다. …다른 주와 캐나다의 형제들은 기쁜 마음으로 대표자 혹은 최고 방침과 합회의 요구 사항을 담은 서신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 화잇은 5월 말이 적기라고 제안했고 곧 날짜가 결정되었다.
첫 회기의 첫날
드디어 1863년 5월 20일 수요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운동 태동기의 지도자 20명이 배틀크릭에서 모였다. 당일에 도착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배틀크릭에 있는 ‘재림교회 제2집회소’에서 모였다.
미시간, 뉴욕, 일리노이와 위스콘신, 미네소타와 아이오와에 현존하는 여섯 합회 중 다섯 합회에서 대표자 18명이 참석하였다. 버몬트 합회(캐나다 국경에 걸쳐 있는 퀘백의 교회들도 포함)는 배틀크릭에 대표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합회로 조직되지 않은 오하이오 주 소속 재림교회에서 대표자 2명을 보냈다. 미시간 합회 정식 대표자는 아니지만 절차에 관심이 있는 배틀크릭 교회 성도들이 참관인으로 다수 참석하였다. 정식 대표자는 모두 남자였고, 엘렌 화잇은 현지 참관인 중 유일하게 여성이었다.
대표자 20명은 먼저 임시 의장과 서기를 선출했다. 의장은 조섬 M. 알드릭이 맡았고 서기는 유라이어 스미스였다. 35세인 알드릭은 1860년에 개종한 사람이었고, 놀랍게도 31세의 스미스는 대표자가 아니라 배틀크릭 교회의 참관인이었다. 초기 교회의 창립자들과 관련한 이 두 가지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젊은이들이었고, 어깨에 힘을 주거나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젊더라도 재능이 있다면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기 위해 각자의 재능을 사용하였다.
의장과 서기를 선출한 후에, 대표자들과 참관인들은 찬미 233장 ‘오랫동안 산 위에서(Long Upon the Mountains)’를 함께 불렀다. 애니 R. 스미스가 작사한 노래이며 1861년에 제임스 화잇이 출판한 찬미가에 수록되어 있었다(1849년 그가 처음 출판한 찬미가의 개정판임).
찬미 후 미시간의 존 N. 러프버러, 뉴욕의 찰스 O. 테일러 그리고 위스콘신의 아이작 샌번이 대표자들의 신임서를 검증하기 위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대총회 창립자들은 찬미하기를 좋아하고 적법한 절차와 위원회를 가치 있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 교회 특징 몇 가지는 초창기부터 계승된 것들이다.
대표자들은 적절한 절차에 따라 승인받기 위해 신임서를 제출하였다. 1864년도 회기의 신임서는 현존하여 사진으로 볼 수 있지만 1863년도의 것은 남아 있지 않다. 대총회 첫 위원회가 업무를 마친 뒤(신임서 20개를 검토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이 될 때까지 휴회하였다.
대총회의 설립
다음 날인 1863년 5월 21일 목요일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먼저 헌장 초안 작성을 위해 8명을 선출했다. 위스콘신 주의 샌번, 미시간 주의 러프버러와 조셉 H. 왜거너, 뉴욕의 존 N. 앤드루스와 네이선 풀러, 아이오와의 B. F. 스누크, 미네소타의 워싱턴 모스와 오하이오의 H. F. 베이커였다. 그들이 지체 없이 보고한 것으로 미루어 대총회 전에 예비 작업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나서 헌장은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그렇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대총회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간헐적인 모임을 넘어 이것은 헌장, 임원 세 명(회장, 총무, 재무),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연례적으로 회기를 개최하는 상설 협회였다.
선거가 진행되어 존 바잉턴이 대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알드리히로부터 의장의 권한을 이임받았다.), 엘리 워커(미시간 합회의 대표가 아닌 배틀크릭 지역 교인)가 재무로 선출되었으며, 유라이어 스미스가 총무로 선출되었다. 미시간 사람 조지 아마돈과 존 앤드루스가 바잉턴과 함께 행정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위원회를 구성하여(J. N. 러프버러, I. 샌번, W. H. 브링커호프, J. M. 알드리히, W. 모스) 주 합회를 위한 헌장 모델 초안을 마련한 뒤 5월 23일 토요일 저녁까지 휴회하였다. 일몰 후 만난 자리에서 대표자들은 모델 헌장(대총회에 소속되려는 합회가 모두 채택해야 할)을 승인하고 또 다른 위원회(화잇, 앤드루스, 스미스)를 구성하여 지역 교회 조직 시 지켜야 할 준칙을 1864년 회기에 발표하기로 했다. 그렇게 1863년 대총회가 마무리되었다. 1860년 후반에 개최된 ‘총회(general conference)’는 꼬박 4일 동안 진행되었지만, 첫 대총회 회기는 단 하루와 두 번의 짧은 저녁 모임으로 사무를 처리하였다.
정직, 사랑과 겸손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의견이 다를 경우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발언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많은 사무가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견에 대해서 그들은 단도직입적이었다. 그러나 자기 뜻을 허심탄회하게 표현하려는 선배들의 경향을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1860년 회의 첫째 날에 제임스 화잇은 적법한 의회 절차대로 의장을 언급하며 첫 연설을 시작했으나 방식이 좀 독특했다. 의장은 화잇의 20년 지기 조셉 베이츠였다. 그의 첫 마디는 “의장 형제님(Brother Chairman)”이었다(정식 호칭으로 부르면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이렇게 불러도 이해하리라 생각하며).3 ‘미스터 체어맨’이라는 통상적인 호칭 대신에 화잇이 ‘의장 형제님’이라고 말한 점에서 우리의 선각자들이 위대한 재림 운동(the Great Second Advent Movement)에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해 왔음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가장 깊은 사랑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격하게 의견이 대립될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1860년보다 1863년에 논쟁이 덜했던 이유는 그리스도 정신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표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핵심 사안에 대해 이미 상당 부분 합의점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뷰>지에서 유라이어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흐뭇한 마음으로 보고했다. “이전의 어떤 모임도 이렇게 일치와 조화로 특징지어진 적은 없었다. 회의의 주요 단계마다…반대의 의견은 없었고, 반대되는 생각조차 있는가 싶었다.”4
이것이 바로 하루 남짓한 시간에 이 모든 것을 이뤄 낼 수 있던 이유 중 하나이다. 또 앞서 언급하였듯 분명히 헌장위원회 구성원 8명 중 몇 사람이 사전에 초안 작업을 진행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적절한 일이었다. 1863년 5월 23일의 결의문에 표방한 대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 그리고 세 천사의 기별과 연관된 진리의 빛을 전할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더 단단히 연합하고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을 1863년 배틀크릭 참석자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대총회 헌장의 서문에 명시되었듯이 대총회는 “사업의 연합과 효율성을 확보하고 현대 진리 사업에 대한 보편적인 관심을 촉진할 목적”5으로 설립되었다.
선구자들에게 배울 점을 여기서 또 발견한다. 1850년대의 논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들은 1863년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즉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려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정 그들은 이 사명을 개인의 입장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1863년 대총회에서 발생한 한 가지 사건으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라이어 스미스의 논평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불일치가 있었던 것이다.
만장일치로 대총회장에 선출된 제임스 화잇이 그 결과를 수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직책을 수락해야 한다는 신자들의 촉구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본인의 입장을 상당 시간 논의한 끝에 그의 반려를 받아들이고 존 바잉턴을 대총회장으로 다시 선출했다.6
제임스 화잇이 거절한 이유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화잇은 여러 해 동안 조직을 위해 애써 왔는데 그것은 재림 운동을 위해 필요해서 한 일이지 자신이 회장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분명 그는 아내 엘렌 화잇과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의 회장이자 자칭 선지자들인 모르몬교의 조셉 스미스나 브리검 영과 비교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제임스 화잇은 여러 성격적 결함이 있었으나 자신을 지도자로 세우면 안 되는 이유를 동료 형제들과 장시간 논의했을 때만큼 인품의 진면목을 보여 준 순간은 없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일보다 새로운 교회의 연합과 사명이 우선이었다.
복음전도자의 정신
목요일 저녁 휴회 이후 토요일 저녁 회의를 재개할 때까지 교회 지도자들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인 전도에 눈을 돌렸다. 유라이어 스미스의 보고에 의하면 5월 22일 금요일, 미시간합회의 전도 텐트(후대에 ‘빅 텐트’라고 불림)가 리뷰 앤드 헤럴드 사무실 근처 “잔디에 세워졌다.” 대표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전도회를 8차례 개최하여 5월 23일 ‘제2집회소’에서 안식일 예배로 마쳤다. 대총회는 5월 24일 일요일 아침에 새 신자 8명의 침례와 함께 마침내 막을 내렸다.7
본 교단 창립자들에 대한 마지막 특징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들은 위원회, 의회 절차, 조직을 중요시하지만 단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그렇다. 그들의 목적은 세상의 끝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었다.
1863 정신
샌안토니오의 제60회 대총회와 미래의 위대한 재림 운동을 앞두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1863 정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연합과 사명을 위해 그때와 똑같은 헌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적절하게 정돈된 절차 역시 계속해서 따라야 한다. 나이 및 기타 조건에 상관없이 신자 모두가 재능과 헌신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
그때처럼 우리는 기꺼이 서로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입장보다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을 중시하려는 그때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이런 특성이 없었다면 대총회는 1863년에 설립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 교회가 전 세계로 확장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특성을 간직하고 있을 때에만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주신 예언적 사명을 이룰 수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그들은 1863년 최초의 대총회에서 사명으로 하나 된 무리이다.
1 ‘Fifth Session’,
2 James White, ‘General Conference’,
3 ‘Business Proceedings’,
4 Uriah Smith, ‘The Conference’,
5 ‘Report of General Conference’,
6 Ibid.
7 Smith, ‘The Conference’
데이비드 트림
대총회 자료•통계•연구소 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