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1881~1891
1880년대
하나님의 메신저
성장하는 교회, 새로운 위기
엘렌 화잇의 생애와 유산
시어도어 N. 레브테로브
1881년 제임스 화잇이 사망한 후, 엘렌 화잇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외로움과 우울에 빠져 저술 활동을 많이 할 수 없던 그녀는 대총회 참석, 장막부흥회 설교, 교회 방문, 다양한 교회 사업 등에 전념했다.
그녀는 동부와 중서부에 있는 버몬트, 메인, 뉴욕, 네브래스카, 미시간, 인디아나 주에서 열린 장막 지회에서 일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와서는 힐스버그 아카데미의 설립을 도왔다.1 힐즈버그는 그녀의 영구적인 거처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질 좋은 열매를 맺는 땅 10,000제곱미터가 딸린” 집 한 채를 구입했고, 그 밭에서 일하고 과일 통조림을 만들며 큰 즐거움을 얻었다. 1882년 7월경, 그녀는 재림교회 교육과 부모 훈련, 청년에 관한 문제 그리고 기타 사항을 다룬 <증언 31>의 저술을 마쳤다.2 끊임없이 일하는 것이 슬픔을 달래는 방법 중 하나인 듯했다.
예언의 영감
1880년대 초, 그녀의 예언 은사를 반대하는 새로운 물결이 나타났다. 엘렌 화잇의 초기 저술 중 일부가 은폐(의도적 숨김)되고 있다는 비난도 있었다. <초기문집>(1882년)이라는 새로운 책에 그녀의 초기 이상과 경험들을 재출간하려는 결정 이후에 그런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그 서적의 의도는 엘렌 화잇의 초기 계시에 대해 늘어나는 비평들을 침묵시키는 것이었다. 어쨌든 몇몇 교인들은 처음부터 그런 반대를 해 왔다.3 엘렌 화잇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성경 영감이 축자적이거나 구술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1년 후에는 자신의 <증언>을 네 권으로 새롭게 수정하여 재출간하려는 대총회의 결정을 지지했다. “사용된 언어가 적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을 교정하고 문법에 맞추기를 나도 원한다.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4 몇 년 후에 그녀는 “영감 받은 것은 성경의 단어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영감 받은 것이다.”5라고 언급했다.
바다를 건너다
1885~1887년, 엘렌 화잇은 아들 W. C. 화잇과 그의 가족 그리고 비서 사라 맥엔터퍼와 함께 유럽으로 갔다. 엘렌의 생애 첫 해외 선교 여행이었다. 그들은 1885년 7월 13일,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맨 처음 머물렀다. 거기서 그림스비에 있는 선교 본부를 방문하고 재림교회 여러 곳에서 말씀을 전했다. 화잇 여사는 수차례 대중 ‘전도’ 강연을 이끌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에는 사우스앰턴에 있는 강당을 빌려서 약 1,000명에게 강연했다. 그녀의 기별에 감명을 받은 신문사에서는 신문에 실을 수 있도록 강연 내용을 적어 달라고 요청했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영국에서 두 주를 보낸 뒤 1885년 9월에 있을 연례회의 때 유럽의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스위스로 향했다. 그녀는 바젤에 거처를 마련했고 이후 2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여행하며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에게 권면했다. 동시에 그녀는 군복무와 안식일 준수, 재림교인 자녀들의 안식일 강제 학교 출석 그리고 재림 기별의 전초 기지인 합회 설립에 관한 행정적인 문제 등 유럽의 독특한 상황들을 직접 경험했다.6
1888년 판 대쟁투
화잇은 1887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원고 중 하나인 <각 시대의 대쟁투> 1888년 판을 마무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7 1858년의 이상을 기초로 그녀는 그 주제에 대해 수차례 원고를 저술한 적이 있었다.8 그런데 유럽에서 종교 개혁 현장과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여러 곳 다녀와서는 새롭고 완성도 높은 내용을 저술하기로 했다.
수정 증보판은 그녀의 가장 유명한 서적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책의 서문 또한 성서 영감의 본질에 대한 최고의 노작 중 하나로 알려졌다. 부분적으로 이 서문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목사이며 개인적으로는 친구였지만 1887년 재림교회를 떠나 가장 가혹한 비평자 중 하나가 된 D. M. 캔라이트가 새롭게 촉발시킨 엘렌 화잇의 예언적인 사역 논쟁에 대한 그녀 자신의 응답이었다. 초기의 은폐에 대한 비난처럼, 엘렌 화잇의 예언적 은사에 대한 캔라이트의 의심은 영감에 대한 축자적 견해에 근거하였다. 엘렌 화잇(그리고 재림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신저의 사상에 영감을 준 반면에 그들의 실제 말들을 받아쓰게 하지 않았다는 자신들의 견해를 고수했다.9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1888년, 엘렌 화잇은 미네아폴리스 총회 기간에 중대한 국면을 맞이한 또 다른 신학적 이슈를 대하였다. 유라이어 스미스와 G. I. 버틀러 같은 재림교회의 옛 지도자들과 캘리포니아 출신의 젊은 신학자들인 A. T. 존스와 E. J. 와그너가 충돌했다. 논쟁의 요점은 성경 예언과 전통적인 해석에 관한 신학적 이슈였다.
신학적 견해가 상이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엘렌 화잇은 총회 이전과 총회 기간에 두 진영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크게 염려했다. 마지막에 그녀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비록 그녀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존스와 와그너의 강조를 지지하였을지라도)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고 신학적인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용납하고 이해하며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를 나타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 집회 동안에 내가 지닌 부담은 내 형제 앞에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정신을 품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분명한 증거가 보였기 때문이다.”10 따라서 그녀가 <정로의 계단>(1892), <산상보훈>(1896), <시대의 소망>(1898), <실물교훈>(1900) 등 무엇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서적들을 미네아폴리스 이후에 저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엘렌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새 빛’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오래되었지만 홀대받은, 다시 세 천사 기별의 ‘정수’로 자리 잡아야 할 진리였다.
미네아폴리스 이후 곧바로 엘렌 화잇은 A. T. 존스와 E. J. 와그너와 함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메시지를 재림교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활동을 전개했다.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 있는 교회에서 시작하여 그들은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교회와 장막부흥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1880년대 말
엘렌 화잇은 <부조와 선지자>(1890) 그리고 건강을 광범위하게 다룬 주요 서적이자 <치료봉사>(1905)의 전신인 <그리스도인 절제와 성경의 위생>(1890년) 이 두 권을 저술하며 1880년대를 마무리했다.
1880년대는 위기의 때였지만, 엘렌 화잇은 피곤할 새도 없이 계속 일했다. 개인적으로는 남편을 잃는 슬픔, 교회가 대면한 다양한 문제의 해결, 해외 선교 등으로 결국 그녀의 경험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성장하는 재림교회가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면서 맞이할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이제 그녀는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녀는 또 다른 선교 사업을 감행했다. 바로 호주였다.
1 다음을 참조할 것. Arthur White,
2 W. C. White, ‘Health of Sister White’, Review and Herald, Sept. 26, 1882, p. 616
3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 다음을 참조할 것, Theodore N. Levterov,
4 Ellen G. White,
5 Ibid, book 1, p. 21
6 Arthur White, pp. 225~244
7 Ellen G. White,
8 예를 들어, 그 책의 1884년 판은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와 퍼시픽 출판사에서 발행되어 수천 권이 판매되었다. 다음을 참조할 것. Ellen G. White,
9 Ellen G. White,
10 Ellen G. White, ‘Looking Back at Minneapolis’, manuscript 24, 1888. In Ellen G. White,
시어도어 N. 레브테로브
미국 로마린다 대학교 내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위원회 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