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떠난 복음 전도
도전이 일상인 이 시대에
앤서니 켄트
전도회 마지막날, 침례를 위한 호소가 시작되자, 침례 결심자들이 언덕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고, 진지하면서도 열성적이고 생기가 넘쳤다.
청중들이 계속 몰려왔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언덕 아래 강단 앞의 열린 공간으로 내려왔다. 이 침례 결심자들은 목사, 장로, 평신도 지도자들과 성경을 공부했다. 방금 전도회 마지막 설교를 들었고 침례 받기로 마음먹고 복장을 갖춰 앞으로 나왔다. 여자들은 하얀 드레스를, 남자들은 흰 셔츠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뭐라고 묘사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침례 받기 위해 줄지어 앞으로 나온 사람은 총 2,495명이었다.
근처에 있는 국제 규격 수영장에서 침례식이 진행됐다. 한쪽 끝에 목사 36명이, 맞은편에 또 20명이 서서 침례를 주었다.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침례 결심자들은 남자와 여자 줄로 나눠 차분히 기다리다 차례대로 들어갔고, 목회자 56명이 다 같이 기도한 뒤 침례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통역으로 참석했던 오스카 오신도 목사는 20년 전의 그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추억하며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어려운 지역
그러나 우리는 케냐 중부 나이로비의 우후루 공원 같은 데서만 전도하는 게 아니다. 전도회에서 늘 그런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다.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복음 전도는 힘겨운 도전이 되고 있다. 필자가 여러 해 동안 목사와 전도회 강사로 일했던 호주의 시골 마을은 인구가 적고 사람들이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예수님과 재림교회로 사람들을 인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규모 침례식은 이제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헛된 꿈이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호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아시아와 영국에서 전도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흔히들 언급하는 10/40 창이란 말은 전도의 어려움을 떠오르게 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에는 기독교 성향이 강한 이른바 바이블 벨트 지역이 존재하지만, 북미 전역이 바이블 벨트인 것은 아니다. 지구 상에서 전도가 어렵다는 것은 이미 여러 곳에서 현실적인 상황이 되었다.
어렵지 않은 때는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우리 시대에만 존재하는 새롭고 독특한 상황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사랑스럽고,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에 전념하시고, 영성과 인품과 성격에 결함이 없으셨던 예수님조차도 전도하시는 동안 거절당하셨다. 누가복음 9장 52~53절에서 예수님이 겪으셨던 거절의 한 장면을 엿볼 수 있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사마리아인들만 예수님을 거절한 것은 아니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잊지 못할 송별식을 치러 주었다.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눅 4:29). 고향 출신 영웅에게 아양을 떠는 장면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나사렛과 다르게 예루살렘은 영웅들을 환영하기도 했던 것 같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미문의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나 걷게 된 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오순절에 설교했을 때 예루살렘의 청중은 환호했다. 일어나 걷게 된 걸인을 보고, 베드로가 예수님에 관해 설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행 3장). 그러나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돌변하여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스데반의 전도회는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았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 6:5)으로 묘사된 스데반이 전도회를 열었지만 그 결과는 침례 후보자들의 행진이 아니라 자신의 장례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라며 특별히 선택하고 세우신 인물이다. 그러나 바울은 선교 사역 기간에 특히 예루살렘에서 엄청나게 핍박받았다. 그의 선교 사역이 언제나 수적인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녹록지 않은 현장에서 복음 전도에 애쓰고 있는 이들은 어떤가? 그들의 노력과 사역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할까?
그들이 열심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또 뭔가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의 노력에 함께하지 않는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침례자 수가 많지 않을 경우, 우리는 강사나 교회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직업 의식이 투철하지 않다거나 실력이 부족하다거나 심지어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숨은 죄가 있다고 비난하는 이들까지 있다.
지난 경험에 비춰 볼 때, 이런 판단이 사실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이들 대부분은 영성이 넘치고, 애정이 넘치고, 존경할 만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성실하게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이 복음 전도를 통해 거두는 결과는 완전의 표본이신 예수님과 위대한 사도 바울의 결과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다른 곳에 비해 복음에 더 쉽게 반응하는 지역이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 소개된 이름 모를 사마리아 동네보다 요한복음 4장에 소개된 수가의 사마리아 마을에서 더 많은 회심자를 얻었다. 비슷하게 사도행전 17장의 베뢰아 사람은 다른 지역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성경에서 예수님과 바울의 전도 실패 사례를 읽으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바울의 영적인 자질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오늘날 돌과 가시가 많은 선교 현장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일하는 충성된 일꾼에게도 같은 신뢰를 보내야 할 것이다. 원수에게 겨눠야 할 비판과 정죄의 화살을 어찌하여 우리의 동료인 복음사역자들을 향해 겨눈단 말인가!
도전에 대한 응전
그렇다면 복음 전파가 어려운 지역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이 가장 멸시당하는 곳에서 우리는 “가장 확고부동해야 한다.”고 엘렌 화잇은 권면한다. “투사가 적은 곳에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시험이 될 것이다”(5증언, 136).
이 구절이 지적하는 것처럼 특히 영적인 태도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우리는 어려움에 굴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꿈꾸고 믿어야 한다. 복음에 관대한 사람뿐 아니라 고집스런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피 흘리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이전에 일으키셨던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하고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붙든다면, 우리 안에 희망의 불꽃이 불타오를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갈망하는 영혼들의 영적인 만족을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영혼 구원을 위한 우리의 열정을 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귓가에 속삭이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라. 그분의 생애, 은혜, 말씀, 사역, 믿음에 집중하라! 그리고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예수께서 승리하신다!
앤서니 켄트
대총회 목회부 부부장이다. 어떤 형편에서든 예수의 증인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