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게 하는 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싶을 때 흔히 던지는 질문이 있다.
“__________를(을) 딱 한마디로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가능한 모든 대답을 한마디로 줄여 가다 보면 가장 본질적인 것을 찾았다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말하라면 표현할 게 너무 많아 당혹감에 빠지고 만다. 다른 말을 제쳐 두더라도 그분은 “진리”이고 “사랑”이며 “심판자” 그리고 “구주”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서기 1세기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분은 “낫게 하시는 분”이라고 너도나도 대답했을 것이다. 숱한 사람이 그렇게 그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분의 가르침이나 그분의 나라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다시 일할 수 있도록 회복된 손을 통해, 무서운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신을 통해, 난생 처음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눈을 통해 ‘그분’을 발견했다. 그들은 나아졌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했다. 치유받았기 때문에 그분을 따랐다. 신체의 질환을 넘어 세상을 회복시킬 능력이 그분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에 그분의 사업에 동참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님 나라의 기초를 쌓으려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치료 사역에 전념해야 한다. 그분의 지상 사역에서 그것이 중심이었다. 전도처럼 시급한 일도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혜롭고 적절하게 가르쳐야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그런 데서 받는 것이 아니다. 회복된 신체에서 진정한 평안을 느낄 때 비로소 진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전도, 교육, 치유가 왜 조화롭게 공존해야 하는지를 마지막 때 하나님의 남은 교회가 150년 동안 강조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재림교인이 마음의 치료제인 성경 진리를 전할 때는 다친 사람을 낫게 하는 건강 사역도 함께 펼쳐야 한다.
이번 달 커버스토리 ‘짐바브웨가 앞장서다’를 읽으면서 친구와 이웃을 위해 기도하자. 인간의 건강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친절하신지를 그들은 여러분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